남북적십자 ‘첫 접촉’ 40주년…이산가족 2만2천명 상봉
정치·군사상황 변화에 교류도 요동쳐


“오마니…, 오마니…”. 예순여덟 살의 할아버지는 아흔 살을 앞둔 모친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의 얼굴을 앙상한 손으로 쓰다듬었다. 두 모자 얼굴은 온통 눈물로 범벅되고 말았다.

2000년 8월15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 ‘6·15 남북공동선언’의 첫 가시적 조치로 이뤄진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연출해냈던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다.

동족상잔의 아픔을 겪은 남북이 본격적인 이산가족 상봉시대로 이어진 이날의 행사를 만들어내기까지 반세기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셈이다.

그러나 남측의 대한적십자사(한적)와 북측의 조선적십자회가 그 사이에서 40년간 ‘거간꾼’ 노릇을 하지 않았다면 ‘이산가족 상봉시대’는 여전히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1971년 8월12일 이뤄진 두 단체의 접촉에서 비롯됐다. 당시 한적이 ‘남북이산가족 찾기를 위한 적십자회담’을 제안했고 이틀 뒤 조선적십자회가 판문점에서 회담을 열자고 답변을 보내면서 만남이 시작됐다.

10일 통일부 집계에 따르면 남북적십자 간 접촉은 9차례의 본회담을 포함해 예비회담, 실무접촉 등 40년간 총 150차례에 이른다.

남북 적십자 간 교류가 남긴 가장 큰 성과는 역시 이산가족 상봉.

두 단체의 지속적인 접촉과 대화의 결과로 1985년 분단 이후 첫 이산가족 만남이 성사됐다. 그로부터 15년 뒤인 2000년 8월15일, 6·15 공동선언을 계기로 100명의 남북 이산가족이 만나면서 본격적인 이산가족 상봉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2010년 10월까지 18차례에 걸친 대면상봉과 7차례의 화상상봉을 통해 이별의 한을 푼 이산가족은 총 2만1천734명에 달한다. 또 상봉 가족을 포함해 총 5만2천913명이 생사를 확인했고 679명이 서신을 교환했다.

두 단체의 교류 성과는 상호 간의 인도적 지원에서도 확인된다.

한적은 1995년부터 민간단체가 맡긴 기증물자와 정부의 남북교류협력기금을 바탕으로 인도적 대북지원 창구 기능을 해왔는데 현재까지 대북지원 규모는 1조899억원에 이른다.

북한도 1984년 남한에 수해가 발생하자 쌀 5만섬, 시멘트 10만t, 옷감 등 상당한 규모의 물품을 한적을 통해 지원하기도 했다. 북한의 정치적 노림수가 담긴 지원이었지만 이 지원을 계기로 남북 당국간 대화와 고향방문단 교환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단체의 교류는 남북 간 정치·군사적 상황 변화에 따라 수시로 요동쳤고 북한 당국은 이산가족 행사를 ‘볼모’로 대규모 인도적 지원을 요청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한적은 여전히 “이산가족 행사는 어떠한 정치적 상황과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추진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김성근 남북교류팀장은 “남북이 합의해 많은 분이 생전에 가족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성과”라면서도 “이산가족 수를 생각할 때 상봉의 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안타까워했다.

김 팀장에 따르면 이산가족 상봉자 2만2천여 명 90% 정도는 상봉 신청자의 가족들로 순수한 의미에서의 상봉자는 2천100여 명에 불과하다.

상봉 신청을 낸 12만여 명 중 4만6천700여 명이 상봉의 날을 기다리다 세상을 떠났고 지금도 8만2천명 안팎의 대기자가 언제 올지 모를 자신의 상봉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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