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학

내가 태를 묻고 성장한 고향은 양강도 혜산시 혜신동이라는 한반도 북단의 국경마을이다. 코앞이 중국 장백현 록강촌이었다. 압록강은 본래 맑고 푸른 물위에 오리가 많이 서식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적어도 내게는 한반도에서 가장 긴 강이라거나 백두산과 함께 한반도를 대표한다거나 하는 부담스러운 상징이 아니다. 여름이면 아이들이 멱을 감고, 겨울이면 스케이트를 타며,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던 일상의 터전이었다. 개울처럼 다정한 강이었다. 때로는 깊고 강하게 성장기 소년의 내면으로 흘러들어 야망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

강은 뛰어가면 집에서 고작 5분이었다. 나는 학교를 파하면 시험기간일지라도 곧장 강으로 달려가곤 했다. 시원하게 냉수마찰을 한 뒤 책을 펼쳐들면 밤새 전등을 맞대고도 외지 못했던 까다로운 문장이 머리속에 쏙쏙 들어왔다. 강폭이 좁아지면서 물 흐름이 급해지는 목에 우뚝 너럭바위가 솟아 있었다. 그 위에 앉아 책도 읽고 한가할 때에는 고기잡이도 했다. 친구들과 누가 더 깊이 들어가는지 내기를 하다가 키를 넘기는 물에 빠져 혼이 나기도 했고, 이 일로 부모님으로부터 접근금지 당하기도 했지만 강은 끝없는 마력으로 나를 불러내는 것이었다.

강 저만치 다른 문명이 있다는 것이 그 마력의 실체인지도 몰랐다. 중국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면 사람들의 남루했던 옷이 조금씩 밝고 화려해지고 있었고, 쓰러져가던 집은 새 단장을 해 말끔히 변하곤 했다. 저쪽 사람들의 형편은 날이 갈수록 달라지고 있는데 내쪽은 반대로 몰락으로 가고 있었다. 중국쪽은 변방의 작은 마을에서조차 개혁 개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뚜렷이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15세 나던 고등중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강을 건너 중국 장백으로 넘어가 명태을 주고 주패(카드)를 바꾸어 왔다. 국경을 지키던 노농적위대원들에게 잡혀 매를 맞고 학교 사로청 총화에서 사상투쟁무대에 올라 엄한 비판을 받았다. 압록강은 더 이상 나를 비롯한 친구들에게 유년시절의 놀이터가 아니었고 냉혹한 생활의 터전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동창생들중에는 강건너 중국과 밀수를 하다가 국경경비대에 걸려 감옥 신세를 지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군인의 총에 맞아 현장에서 즉사한 친구도 있었다. 압록강은 이제 비정한 얼굴로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첫사랑도 이곳에서 시작되었고, 그 사랑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준 것도 이 곳이었건만 이제 내가 어둠을 틈타 그 강을 건너 북한을 빠져나온 뒤에 나의 사랑도 함께 끝이 나 버렸다.

잊지 못할 유년시절과 학창시절, 30년 내 삶의 애환이 아로새겨진 이 강을 떠나던 날 나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어머니가 젖먹이 어린애를 두고 영원히 이별하는 아픔을 느꼈다. 지금도 향수에 젖으면 압록강이 떠오른다. 세월이 흘러 사람들의 얼굴도 희미해지고 산천도 의구치 않더라도 압록강 너만은 그때처럼 흘러야 한다. 그 너럭바위 위에서 내 소년시절의 주옥같은 추억을 다시 길어올릴 그 날을 두손 모아 기대해 본다.

/1968년 양강도 혜산 출생. 통일정보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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