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은 작년 말까지 체제 보위의 최일선에 장성택 당 행정부장과 류경 보위부 부부장을 '투 톱'으로 내세웠다. 류경은 5만여명의 보위부 요원을 이끌고 간첩 및 반체제 인사 색출에 앞장섰고, 장성택은 보위부 등 공안기관과 사법기관을 감독했다. 류경과 장성택은 서로를 감시하는 관계였다고 정보 당국은 보고 있다.

◆"정보·무장조직 거느린 류경에 위협 느꼈을 것"

철통 같은 체제 보위 시스템은 김정은이 권력 세습을 위해 보위부 장악에 나서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북한 내부 소식통은 "김정은은 보위부 보고를 받으면서 류경 라인이 보위부 전체 시스템을 손에 넣은 사실을 알고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류경은 수시로 김정일에게 불려가 독대하며 술을 마실 정도로 김정일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보위부 간부들도 두뇌 회전이 빠르고 김정일 신임이 두터운 류경을 따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보 당국이 김정은이 자신의 측근들을 보위부에 심기 위해선 류경 인맥부터 솎아낼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김정은은 후계자로 등장한 직후인 작년 10월에만 보위부를 두 차례 방문하며 보위부 장악에 공을 들였다. 북한은 작년 9월 당 대표자회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보위부 정치국장(김창섭)을 당 후보위원에 임명했었다.

장성택도 류경이 눈엣가시 같은 인물로 봤을 것이라고 북한 소식통들은 전한다. 김정일 매제인 장성택은 과거 주변의 견제로 2~3차례 숙청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보위부 반탐(反探) 부부장 자격으로 자신을 감시하는 류경을 불편해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류경은 각종 정보를 틀어쥐고, 무장한 조직을 거느린 위협적인 존재였다. 김정일도 권력이 커진 류경이 권력 세습에 장애물이 되는 것은 원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류경 '제거 작전'은 전격적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김 부자(父子) 정권은 보위부 내에선 류경 체포가 쉽지 않다고 판단해 지난 1월 초 김정일 관저에 류경을 초청하는 형식으로 호출한 뒤 관저에서 붙잡았다고 내부 소식통은 전했다. 류경의 부모와 남동생 등 가족들은 모두 수용소로 끌려갔다고 한다.

한 고위탈북자는 "류경의 제거는 초대 보위부장이던 김병하 숙청 때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김병하는 1973년 초대 보위부장에 오른 뒤 김일성 체제 보위와 김정일 후계 구축에 앞장섰다. 그러나 10년간 보위부장을 지내면서 권력이 집중되자 1983년 자살을 강요받은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병하 가족들도 모두 수용소로 보내졌다. 류경 제거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최근 평양 정권은 류경뿐 아니라 3대 세습에 걸림돌로 여겨지는 간부들을 줄줄이 숙청하고 있다. 작년 4월 화폐개혁 실패의 책임을 물어 박남기 당 계획재정부장을 총살한 데 이어 6월에는 김용삼 철도상과 문일봉 재정상도 처형한 것으로 알려졌다.

"숙청의 공포를 이용해 간부들을 통제하면서 김정은 후계 기반을 다지려는 의도"(이조원 중앙대 교수)란 관측이다. 숙청은 체제가 불안정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조영기 고려대 교수는 "김일성·김정일은 고비 때마다 숙청으로 위기를 벗어났지만 지금처럼 오랜 경제난으로 민심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예전 같은 공포 정치가 통할지 의문"이라고 했다.

◆보위부 혼란, 남북관계에도 영향?

김정일 정권의 핵심 기반인 보위부는 남북관계에도 깊숙이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 회담을 하면 보위부 요원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등 대남기구의 명찰을 달고 반드시 참석한다. 대북 소식통은 "보위부원들이 류경의 숙청을 보고 몸을 사리는 것으로 안다"며 "북한이 대화 공세를 펴다가 갑자기 침묵하는 등 이상 행태를 보이는 것도 보위부 내부 혼란과 관련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현재 평양 정권은 류경의 제거를 입에 담지 말도록 통제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은 올해 김일성 생일(4·15)을 맞아 보위부 예술대의 공연을 관람했는데, 류경 숙청으로 땅에 떨어진 보위부원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국가안전보위부

우리의 국가정보원 격으로 반(反)체제 사범을 색출하고 주민 사상을 감시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한다. 체포·구금을 맘대로 할 수 있어 주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5만여명의 요원들이 중앙 정부와 도·시·군은 물론 각 기관과 기업소까지 나가 주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국정원장에 해당하는 보위부장은 1987년 리진수 사망 이후 공석으로 남아 있으며 김정일이 직접 조직을 장악하고 지휘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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