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은 산업화에 모든 것을 걸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설령 민주주의를 깨고서라도 죽어라 하고 고도성장만 추구하면 다른 가치들은 저절로 뒤따를 것이라는 식이었다. 바로 ‘기관차 이론’이라는 발상이었다.

그래서 그랬던지 어쨌든 산업화는 이룩됐다. 그러나 다른 가치들이 고도성장 뒤를 자동적으로 따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산업화가 진척될수록 민주주의, 인권, 사회통합, 복지, 환경, 공정한 관계, 깨끗한 풍토…는 더욱 뒷걸음을 쳤다. 여기에 60~80년대 개발독재의 숙명적인 한계와 맹점이 있었다.

사람 사는 세상에는 항상 ‘이유있는 갈등’이 있게 마련이다. 억울한 사연, 손해본 사연, 얻어맞은 사연, 열받은 사연, 상처받은 사연, 황당한 사연들이 끊임없이 사회문제·정치문제·갈등현안들을 일으킨다. 그런데 개발독재는 ‘고도성장’ ‘총력안보’ ‘부국강병’이라는 지상명제로 그 모든 ‘이유있는 사연들’을 철저히 눌렀다. 결국 개발독재는 한 가지 처방으로 다른 모든 증세들을 마취시키거나 억제하려다 실패한 셈이다.

그렇다면 오늘은 어떤가? 민주화 이후 그 가려졌던 ‘다른 가치들’을 고루 빛보게 하려는 노력은 대단히 발전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요즘의 ‘정상회담 시국’에서 또다시 옛날의 ‘한 가지’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한 가지 처방으로 모든 애로사항 돌파…”라는 옛날식 ‘기관차 이론’이 또다른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지상명제만 눈 딱감고 밀어붙이면 웬만한 다른 것들은 저절로(?) 잘 넘길 것이라고 하는 낙관 분위기 고취가 그것이다.

하지만 정상회담이나 ‘남·북’은 과연 만병통치약인가? 그 ‘기관차’만 죽어라 하고 달리게 만들면 ‘중동특수’ 못지 않은 ‘북한특수’가 일어나고, 온갖 골치아픈 정치·사회 갈등현안들이 무난히 진정되며, 보통국민의 일상생활이 눈에 띄게 달라질 것인가?

정상회담이나 ‘남·북’은 물론, 역사적인 숙원사업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예컨대 ‘의·약 갈등’을 해결할 수는 없다. ‘금융파업’ ‘이익집단 떼쓰기’ ‘기업 자금난’ ‘교실붕괴’ ‘공기업 개혁’ ‘국토 난개발’ ‘지자체들의 환경파괴’ ‘오락가락 정책실패’도 해결할 수 없다. ‘통일’ ‘정상회담’ ‘남·북’은 결국 대단히 중요한 일이지만 그 ‘바람’ 하나로 다른 모든 증세를 치유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집권 측은 지금 정상회담 하나에 완전히 도취해있는 표정들이다. 김정일이 순안비행장에 직접 영접나온 것을 본 그 순간부터 거의 ‘뿅’간 모습들인 것이다. 장관들은 저마다 “이것은 나만 들은 이야기인데…”라는 투로, 거기서 주워들은 소리들을 연일 흘리며 으쓱거린다. 마치 향후의 국내정치도, 경제위기설(설)도, 갈등현안도, 사회병증(병증)도 모두 정상회담이라는 현란한 ‘작품’ 하나로 너끈히 돌파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기색들이다.

그러나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이다. ‘남·북’은 ‘남·북’이고 내치(내치)는 내치다. ‘남·북’은 내치를 포함한 국정백사(백사)의 한 가지 항목이지 그 전부가 아니다. ‘남·북’이 내치를 대신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국민의 일상적인 삶에 있어서는 ‘남·북’보다 내치가 훨씬 더 절박한 발등의 불로 육박해올 수도 있다. 정상(정상)들의 ‘그들 나름의 정치적 삶’이 있는가 하면 생활 속 국민들의 ‘일상의 삶’ 또한 엄연히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의 고도성장이라는 기관차나 마찬가지로 오늘의 ‘남·북’이라는 기관차도 집권 측의 모든 골칫거리들을 일거에 파묻어주는 ‘마법의 지팡이’는 될 수 없다. ‘남·북’이 아무리 잘 나가도 내치가 삐꺼덕거리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청와대가 요즘 한숨쉬고 있다는 까닭이 거기에 있을 것 같다.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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