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광일
/1954년 함경북도 김책시 출생. 한국전력 동부지점 근무

내 고향은 함경북도 김책시(옛 성진시) 쌍암동 대동골이라는, 시내가 흐르는 작은 골짜기 마을이었다. 여름방학이면 방학숙제를 대충 해치우고는 할머니가 쩌준 감자와 풋강냉이 한소랭이를 게눈 감추듯 먹어치우고는 검은 연기 세차게 내뿜는 성진제강소 옆 쌍바위가 우뚝하게 솟은 해변가 도래굽이에서 해가 지는 줄 모르고 친구들이랑 해수욕에 정신이 팔렸다.

지금도 추억에 젖으면 웃음을 참을 수 없는 것은 해수욕장에 인접한 포구에 가끔씩 돛단 고깃배가 닻을 놓고 성게 해삼을 비롯한 진귀한 어물을 내리게 되면 아이들이 모여들어 저마다 시루속의 콩나물처럼 머리를 빼들고 구경하던 모습이 떠올라서다.

햇볕과 해풍에 가맣게 그을린 아이들은 어느새 빼곡한 사람들 다리 사이로 살아 꼬물거리는 해산물을 날쌔게 가로채 해수욕장 저편으로 줄행랑을 놓는다. 그 뒤를 따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어부들과 쫓기는 아이들 모습이 너무 재미있어 백사장에 몸을 지져대던 어른들까지도 키득키득 웃음을 참지 못한다. 1960년대 인정과 인간의 묘연한 정서가 어울린 고향의 추억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10년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찾았을 때에는 아늑한 보금자리로만 간직되던 고향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성진제강소의 확장과 급속히 늘어난 인구로 다닥다닥 양철지붕의 초라한 주택이 들어찼고, 하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악취를 풍기는 생활오수는 대동천의 작은 개울조차 오물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아침 출근길은 더욱 가관이었다. 대동골의 좁은 길은 이곳 한국에서 출근길에 자동차가 막혀 제속도를 내지 못하는 것처럼 걸어서 출근하는 사람들로 몸과 몸을 부딪치며 출근해야 하는 모습은 마치 물길이 막혀 오골거리는 미꾸라지떼를 방불케 했다. 여름철 장마가 시작되면 대동천 옆으로 난 초라한 이 길은 형체없이 파괴되어 유일한 통근로를 잃은 사람들은 산릉을 에돌아 길 아닌 길로 학교와 직장으로 출퇴근했다.

성진내화물공장에서 나오는 유해가스로 주변 산은 가을단풍처럼 발갛게 타죽고 살아있는 나무마저도 땔거리가 없는 사람들이 난벌하여 이미 벌거숭이가 된 지 오래였다. 산이 타죽고 있는데 그 공해 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건강은 말해서 무엇하랴.

티없이 맑고 깨끗했던 도래굽이 해수욕장의 바닷물은 여과하지 않는 성진제강소의 산업폐기물과 생활오수로 썩어문드러지고 있었다. 제강소쪽에서는 이따금씩 큰 폭탄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쿵쿵 들려오곤 했는데 제강소의 강철직장과 주물직장에서 뜨겁게 이글거리는 산업폐기물을 바다에 버리면서 수증기를 일으키며 생기는 굉음이라고 했다. 굴뚝에서 나오는 먼지와 연기는 시내를 온통 시커멓게 물들이고 여름에는 흰옷을 입고 나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나의 고향은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로 변해가고 있었다. 게다가 1990년대 식량위기 때에는 북한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내 고향 김책시에서 죽어나갔다고 한다. 역과 대합실에 추위를 피해 들어갔다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달구지에 실려나간 사람만 해도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위정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데 나의 고향은 이렇게 처절하게 파멸돼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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