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가의 전시는 세필(세필)에서 시작, 봉걸레의 그림으로 끝난다. 그 속에는 동서양 현대미술사가 고스란히 들어 있고, 국민 화가의 활화산같은 붓의 에너지가 녹아 있다.

운보(운보) 김기창(김기창·88) 화백. 이제는 신화가 된 거목의 70년 화업(화업)을 모아 그 거대한 뿌리를 보여주는 특별전이 오늘(5일)부터 일반에 공개된다. 조선일보미술관(02-724-60328)과 갤러리현대(02-734-6111)에서 8월 15일까지 동시에 열리는‘바보예술 88년―운보 김기창 미수기념 특별전’이다.

큰 화가 운보는 전작도록에만 작품 4000여점이 수록됐고, 통산 1만여점이 넘는 작품을 그린 힘의 작가다. 그 뜨거운 열정의 작품들 중 대표작 88점을 엄선해 전시도록에 싣고, 80점 가까운 작품을 전시장에 걸었다. 다소곳하게 앉은 여인과 화조가 있는가 하면, 싸우는 소와 격렬하게 달리는 군마가 전시된다.

한국적인 산수와 풍속화가 나타나는가 하면, 힘있는 추상화가 관람객을 반긴다. 출품작들은 도저히 한 작가의 작품 같지가 않다. 화가로서 운보의 성공과 변모는 물론, 첫사랑과 결혼, 부인과의 사별, 고독과 봉사 등 다양한 개인사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베토벤과 고야처럼 청각장애를 딛고 의지로 일어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운보는 침묵의 바다에서 성난 파도의 그림을 그렸고, 언제나 ‘예술의 반란’을 꾀했다. 자신의 예술세계를 거의 10년을 주기로 뒤엎으면서 새로운 세계를 선보여왔다.

이번 특별전은 시대별로 그런 운보 작업을 전시한다. 조선일보 미술관에는 폐결핵으로 세상을 뜬 운보의 첫사랑 소녀를 그린 선전 입선작 ‘정청(정청)’(34년)을 비롯, 일반에 첫공개되는 개인 소장작‘군마도’(69, 86년), 50년대에 그린 30점의 ‘예수의 일생’ 연작중 대표적인 10점, 한국 풍속을 묘사한 대표작 ‘흥락도’(57년), 청록산수 초기작인 ‘청산도’(67년) 등이 전시된다.

갤러리현대에는 청록산수 중 백미로 꼽히는 ‘청산도’(70년), 동서미술의 접합이란 극찬을 받은 ‘세 악사’(70년대 추정)를 비롯, ‘정자’(76년) ‘오수’(76년) 등 바보산수 연작, ‘바보 화조’ 연작, 봉걸레로 그린 90년대 추상화 ‘점과 선 시리즈’까지 그의 후반기 작업을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운보의 친동생인 북한 공훈예술가 김기만 화백의 ‘홍매’도 전시된다. 평양의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중인 운보의 미인도 4점을 북한 화가가 모사한 2점의 작품(여름, 겨울)도 선보인다.

오광수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운보는 전통적 한국화 소재인 인물 화조에서 청록산수, 민화풍의 바보산수, 현대적 풍속도, 추상적 이미지의 작업에 이르기까지 소재가 다양하며, 세밀 표현에서 대상의 해체와 재종합, 순수한 묵법에 의한 추상까지 표현기법도 화려하다”며, “이번 전시는 운보의 모든 것을 볼 귀한 기회”라고 평했다.

80년간의 긴 침묵 속에서 작업해온 운보는 어쩌면 그의 생에 마지막이 될 지 모를 이번 전시회 기간 내내 예술혼의 천둥소리를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

/진성호기자 shji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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