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백악관 게리 새모어 대량살상무기 정책조정관은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이 북한의 핵개발로 안보 위협을 느껴 전술핵 재배치를 공식 요구한다면 미국이 응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전술 핵무기는 군사작전 목표물을 타격하기 위해 야포나 단거리 미사일 등으로 운반할 수 있는 수십㏏ 위력의 소형 핵무기로, 대도시 전체를 무력화할 수 있는 수백㏏급 전략 핵무기와 대비된다.

새모어 조정관은 사견(私見)임을 전제로 전술 핵무기 재배치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미 행정부의 군축·비확산·대(對)테러 업무를 총괄하는 자리에 앉아있는 그가 이처럼 민감한 이슈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한 말은 아닐 것이다.

지난 25일 우리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를 비롯한 보수 정당 의원들이 ‘미국 전술핵 재배치’ 더 나아가 ‘자체 핵(核)무장론’까지 주장하는 것을 지켜보고서 미국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선(線)을 그어 보인 것일 수도 있다.

1991년 11월 8일 노태우 대통령은 핵무기를 제조·보유·저장·배비(配備)·사용하지 않겠다는 한반도 비핵(非核) 5원칙을 발표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18일 노 대통령은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에는 단 하나의 핵무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핵 부재(不在) 선언을 했다.

노 대통령이 미국의 해외 전술 핵무기 철수 방침을 적극 수용해 주한미군에 배치돼 있던 전술 핵무기 200여발을 철수시키기로 한 것은 당시 핵무기 개발 의혹을 사고 있던 북(北)을 겨냥해 “우리가 먼저 핵무장을 벗어던질 테니, 너희도 포기하라”고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남북은 그해 12월 31일 판문점에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합의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지금 북은 최대 10개의 핵무기를 개발해 놓았고, 두 차례 핵실험까지 마쳤으며, 매년 핵무기 1개씩 만들어낼 수 있는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 2000기를 버젓이 공개했다. 또 핵은 대미 방어용이라던 말을 뒤집고 남쪽을 향해 “핵 억제력을 바탕으로 보복 성전(聖戰)을 벌이겠다”는 공갈을 서슴지 않고 있다.

북이 남한 전역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핵무기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는 판에 우리가 휴짓조각이 돼버린 비핵화 합의문 한 장 들고 벌거벗은 채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북에 “몇년 몇월 며칠까지 비핵화 약속을 이행하라. 그렇지 않으면 미국 전술 핵무기를 재배치하겠다”는 입장을 통보하는 방안을 검토할 때가 됐다. 시한(時限) 전에 북이 비핵화와 관련된 진전된 자세를 보인다면 그 순간 재배치 방침을 철회할 것이고, 전술핵을 재배치한 이후라도 북이 태도를 바꾼다면 언제라도 철수하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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