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호
/전 국정원(안기부) 차장

최근 국정원 간부 몇 사람의 비리 혐의와 ‘수지 김’ 사건 은폐 혐의로 국정원이 여론의 비판을 받고 있다. 정보기관이 그 직원의 비리 또는 잘못된 운영으로 물의를 일으켜 비판의 대상이 된 사례는 외국 정보기관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 CIA의 경우, 직원 앨드리치 에임즈가 구소련 KGB에 포섭되어 1994년 체포될 때까지 10여년간 CIA 기밀을 유출한 사건으로 오랜기간 후유증에 시달렸었다. 그러나 CIA 사건 경우와는 달리 국정원 관련 이번 스캔들은 국정원 간부가 금융 비리와 관련하여 돈을 받은, 그리고 살인 사건을 대공사건으로 은폐시켰다는 후진국형 추문이라는 점에서 더욱 불명예스럽다.

우리 국정원이 어떻게 이러한 후진국형 스캔들에 아직도 휘말리고 있는가?
근본적으로는 사건연루 직원의 개인적 도덕성이 원인이겠지만 국정원 운영에 있어서 구조적 문제점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국정원은 다른 선진국 정보기관과는 달리 과거부터 통념적 정보업무 범위를 넘은 역할을 수행해왔다. 선진국 정보기관은 업무 초점이 국가안보 관련 정보수집과 그 관련 활동에 집중되어 있으나, 국정원은 정보업무 외에 국정운영 전반에 걸쳐 대통령을 보좌하는 광범위하고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 오고 있다.

바로 이러한 국정원의 확대된 업무영역 때문에 국정원이 권력기관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어 있고 권력기관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비리가 싹틀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고 있는 것이다.

국정원은 1961년 그 전신인 중앙정보부 창설 당시부터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정보업무 이상의 역할을 부여받았었다.
당시 중정(中情)은 한편으로는 북한과 치열한 저강도(低强度) 전쟁을 치르면서 또한 박 대통령의 정책 의지를 차질없이 구현하도록 하는 역할에 동원되었었다. 박 대통령의 정책이 제대로 집행되는가를 모니터하는 기능을 수행했고, 그 결과는 다시 정책 입안에 반영(feedback)되는 통치 순환 메커니즘에 주요 기능을 담당해왔다. 이러한 정보기관 운영방식은 박 대통령 이후 정권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계속 이어져왔던 것이 국정원의 현실이다.

이와 같은 우리 정보기관의 국정 역할 수행은 북한과 치열한 체제 경쟁을 벌이면서 급속한 국가발전을 도모했던 역사 발전 과정에 필요했던 시대적 요청이었으며, 국가정책 효율성을 극대화시킨 긍정적 측면도 많았다.

그러나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까지 그런 역할을 해서는 곤란하다. 북한의 지속적인 위협, 주변정세의 빠른 변화, 특히 9·11 테러 사건 이후 신국제 질서 태동 움직임 등 국제정세의 유동성과 불확실성은 나날이 증대되고 있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에서 안보위협을 식별해내고 중장기적 대책을 수립하는 중추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정부 부처는 국정원 뿐이다. 이러한 막중한 임무를 감당하기 위해 국정원은 하루빨리 자체 혁신의 과정을 통해 유능한 전문 인재 집단으로 구성된 단단한 조직으로 탈바꿈해야 할 것이다.

국정원이 걸어온 역사적 과정에는 많은 공(功)과 과(過)가 병존해 있다. 그 공은 드러나지 않은 채 우리 역사에 스며들어 있으나 과는 스캔들의 형태로 표면화하여 비난의 표적이 되어 왔다.
부시 미국 대통령은 2001년 대통령 취임 직후인 3월 21일 CIA 본부를 방문, 직원들을 격려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일반 국민은 CIA의 수고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대통령은 이를 잘 알고 있다. CIA가 다른 정부 부처와 달리 ‘좋은 뉴스’를 제공하지 않는 유일한 정부 부처가 되기 바란다.”
우리 국정원도 뉴스 초점으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체제와 삶을 위협하는 세력에 조용하되 철저히 대처하는 정보기관의 모습으로 역할이 정립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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