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자전인 ‘훈몽자회’에 광대 괴(괴), 광대 뢰(뢰)로 돼 있고, 그 후에 나온 ‘만물초’에는 괴뢰를 광대놀음, 꼭두각시로 풀이하고 있다. 곧 유희에 썼던 실체 아닌 허상을 뜻했다. 이 괴뢰의 기원에 대한 설은 많다. 중국문헌인 ‘안씨가훈(안씨가훈)’에 보면 옛날에 곽씨 성의 사나이로 대머리가 유별나 곽독(곽독)이라는 이가 탈굿을 잘 했기로 가면극을 곽독굿이라 했고, 이것이 괴뢰희의 기원이라 했다.

또 괴뢰자(괴뢰자)라는 이가 상가를 돌아다니며 슬픔을 덜어주던 것이 그 뿌리요, 괴뢰라는 말도 그 꾸민 사람의 이름에서 비롯됐다고 했다(계륵편·계륵편). 흉노의 부장인 모돈(모돈)이 한 고조를 백등에서 포위하고 있을 때 여장부인 모돈의 아내 아지가 그 한 쪽을 담당하고 있었다. 한데 어느 날 멀리 모돈이 지키고 있는 진지 인근에 곱게 차린 여자들이 드나드는 것을 보았다. 아지가 투기심을 일으켜 성을 풀어 농성작전이 와해되고 만다. 실은 기녀(기녀)인형으로 투기를 유발한 한나라 측의 괴뢰작전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괴뢰놀음의 시초라기도 했다(악부잡록·악부잡록).

중앙아시아에서 발생한 이 가면놀음은 서역, 중국을 거쳐 고구려시대에 유입된 것으로, 당나라 장군 이적(이적)이 고구려를 파하고 그 기념으로 제 임금에게 진상한 전리품 가운데 이 꼭두각시놀음인 괴뢰희가 끼여 있었다. ‘구당서’ 음악지에도 고구려에 괴뢰희가 있다는 기록이 있고, 전기 ‘계륵편’에도 고구려에 괴뢰희가 있다 했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의 이사부(이사부) 장군이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정벌했을 때 좀체로 투항하지 않는지라 나무로 사자를 깎아 배에 실어 섬 둘레에 배치하는 괴뢰작전을 썼다. 섬에서는 투항하지 않으면 맹수에 밟혀 죽을지 모른다 하여 굴복했다는 것이다. 이 괴뢰희는 면면이 계승되어 남사당의 광대놀음이나 꼭두각시 놀음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이것이 정체성 없는 꼭두각시 정권의 대명사로 남북 간의 매도 용어가 돼 온 지 50수년이 되었다. 그 말이 난무하던 휴전선에서부터 사라지더니 북한 신문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며, 국방부에서도 북괴란 용어를 쓰지 않기로 공식으로 표명했다. 민족사에 아픈 상처만을 남기고 꼭두각시는 이렇게 무대 뒤로 사라져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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