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수령의 권위가 극에 달했던 1980년대에는 협동농장에서 담배농사를 짓는 청년분조 처녀 20여명에 대한 이야기가 노동신문과 조선중앙TV 등을 통해 자주 소개됐다.

대북 단파라디오 '자유북한방송'은 6일 한 북한 장교의 증언을 통해 협동농장 처녀들이 김일성 주석의 지시에 따라 군인들과 집단결혼식을 올렸던 사연을 전했다.

방송에 따르면 그들은 중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 진학을 하지 않고 "수령님의 심려를 덜어드린다"며 학급 전체가 평안남도 양덕군 은하리 협동농장에 지원한 처녀 농민들이었다.

김일성은 산간 오지에서 청춘을 바쳐가며 충성하는 그들을 직접 찾아가 기념사진을 찍기도 하고 평양에서 진행되는 농업대회에 불러 주석단에 세워주기도 했다. 북한 정권은 처녀들을 수령과 당에 충성하는 귀감으로 만들어 주민들을 세뇌시키는 데 활용했다. 하지만 그들을 혁명적 모델로 이용하는 것도 한 때였다. 4~5년 뒤 그들이 시집갈 나이가 됐기 때문이다.

자의로 청년분조를 해산시킬 권한이 없는 관리 간부들은 난처한 처지가 됐다. 간부들은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당 중앙에 사실을 보고했다.

처녀들이 시집갈 나이가 돼 청년분조가 해산될 위기에 처했다는 보고를 받은 김일성은 "그 애들을 집체로(단체로) 시집보내주라"는 교시(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교시 집행단위인 교도지도국 지휘관들은 곧 기발한 아이디어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제대(전역)할 군인들 중에서 총각 20명을 뽑아 "명령00호에 따라 집체로 장가가야 한다"고 지시했다.

이들 군인을 데려다 놓고 지휘관들은 책상위에 20장의 사진을 얼굴이 보이지 않게 뒤집어 놓았다. 군인들은 제비를 뽑아 차례로 얼굴이 보이지 않게 뒤집어 놓은 처녀들의 사진을 한 장씩 집어들었다.

못생겼는지 잘생겼는지, 키가 작은지 큰지 알지도 못하고 뒤집어 본 딱 한 장의 사진 속 처녀가 바로 색시로 정해진 것. 그들에게는 모두 이런 방법으로 색시가 한 명씩 정해졌다.

그들은 곧 명령대로 협동농장으로 이동했고 마중나온 처녀들은 조금도 헷갈리지 않고 자신의 신랑감 앞에 마주섰다. 군부가 총각들이 손에 집은 여자의 사진을 보고 그 여자들에게도 상대방의 사진을 보내준 것이었다.

며칠 뒤 그들은 모두 집체결혼식(단체결혼식)을 올리고 협동농장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됐다.

분명히 명령에 의해 올려진 결혼식이었지만 사회를 맡은 군 지휘관과 당 간부는 "동무들은 어버이 수령님의 배려에 의해 부부가 됐습니다"라고 강조했다.

신랑들은 군복무를 12년이나 하고 마음에 없는 결혼을 해 농민이 된 것이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명령이든 배려든 수령님의 교시를 거역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랑들은 결혼식 다음 날 색시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부모들은 힘겹게 키워 12년의 군복무까지 마친 자식들이 생면부지의 농촌 여자를 데리고 농민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억울해했다고 한다.

어떤 부모는 아들에게 꾸지람을 하기도 했고, 아들은 서운함에 "아버지, 어머니 그것은 어버이 수령님의 배려라고 하지 않아요"라며 화를 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는 "세상에 무슨 그따위 배려가 다 있냐. 그것은 배려가 아니고 독재다"라고 소리쳤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단다. "영감,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그런 말을 망탕(마구) 하우. 온 집안이 망하는 꼴을 보려고 그러우. 지금은 벽에도 귀가 있는 때라는 것을 몰라서 그러우"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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