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사망한 북한의 조명록 군 총정치국장(당 정치국 상무위원,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겸직)의 시신을 장지까지 옮기는데 북한이 자체 개발했다는 ‘승리 장갑차’가 쓰여 눈길을 끌었다.

북한 매체에 따르면 10일 평양시내 중앙노동자회관에서 영결식이 끝난 뒤 조명록의 유해는 장갑차에 실린 채 도심을 관통해 약 10㎞ 떨어진 ‘애국열사릉’까지 이동했고, 시민과 군인 10만여 명이 연도에서 운구 행렬을 지켜봤다.

북한의 고위 군장성 장례식에 장갑차가 동원된 것은 1995년 2월 오진우 전 인민무력부장에 이어 두번째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번 조명록 장례는 15년 전 오진우 때의 격식과 절차에 준해 대동소이하게 진행됐다.

조명록의 경우처럼 오진우 장례도 ‘5일간의 국장’으로 치러졌다. 유해를 실은 장갑차 운구 행렬이 많은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양시내를 행진한 것도 똑같다.

대략 ‘군부 1인자’의 장례에는 ‘5일 국장’, ‘장갑차 운구’, ‘평양시내 퍼레이드’ 정도의 기본 격식이 갖춰지는 셈이다.

차이가 있다면 오진우 장례식에는 김 위원장이 참석했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지난 8일 후계자 김정은을 대동하고 조명록의 빈소에 조문했으나 영결식 때는 두 사람 다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진우는 1970년대 초반 김정일 위원장의 후계자 지위가 확실하지 않던 시절 ’혁명 1세대’를 규합해 후계 옹립에 앞장선 인물로 1976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20년 가까이 인민무력부장을 지냈다. 김 위원장 입장에서는 가장 어려울 때 결정적인 도움을 받은 ‘최고 공신’인 것이다.

이에 비해 조명록은 1998년 9월 김 위원장 자신의 통치체제가 출범할 때 국방위 제1부위원장을 맡으면서 사실상 ‘군부 1인자’ 바통을 오진우한테서 물려받았다.

조명철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박사(국제개발협력센터 소장)는 조명록 장례의 ‘장갑차 운구’에 대해 “후계자 김정은 시대에도 선군정치 기조가 유지될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고위층 출신 탈북자는 “마지막 가는 길까지 장군님(김정일 지칭)을 무력으로 받드는 선군시대 충신의 본보기로 삼으려는 의도”라고 해석했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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