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1년 전에만 만났어도 형님을 생전에 뵐 수 있었을 텐데…"

3일 금강산면회소에서 열린 추석계기 이산가족 상봉행사 단체상봉에서 남측 가족 서익환씨(72)는 국군 포로였던 형님 고 서필환씨가 북측에 남긴 세 아들 백룡(55)·승룡(45)·철룡(42)씨를 만났다.

익환씨는 조카들을 통해 형님이 지난해 4월 남측 가족과 부모님을 그리워하다가 뇌출혈로 사망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애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익환시는 4남 3녀의 7남매 중 막내였고 필환씨는 셋째였다. 헤어질 당시 12살이었던 익환씨에게 22살의 필환씨는 큰 형님과 다름 없는 존재였다. 형님은 서울 을지로 3가에 있는 회사를 다녔고 일주일에 한번씩 경기도 이천에 있는 고향집을 찾아오곤 했다. 그러던 중 형님은 전쟁이 나기 1년 전인 1949년 군에 징집이 됐다. 서씨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서울 한남동에서 입대훈련을 받던 형님을 한 차례 면회했고 그것이 형님과의 마지막이었다.

형님은 6·25가 터지자 포병부대 소속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국방부는 서씨 가족에게 필환씨가 1950년 7월 15일자로 행방불명됐다는 소식만 전했다.

익환씨는 "어머니께서는 형님의 생존사실을 모르고 돌아가셨다"며 "생사확인조차 안된 형님을 떠올리실 때마다 '군대에서 얼마나 고생했겠냐. 제대로 먹기나 했겠냐'며 평생 가슴에 한을 묻고 사셨다"고 말했다.

'행방불명'으로 알고 있던 필환씨가 살아있다는 소식이 날다든 것은 57년이 지난 2007년 말이었다.

중국에 있던 지인을 통해 형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익환씨는 바로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하려했으나 아쉽게도 2008년에는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없었다.

익환씨는 2009년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해 이번에 상봉에 포함이 됐으나 형님은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북측 조카 백룡씨는 준비해 온 가족들 사진과 필환씨가 생전에 받은 각종 훈장 15개를 탁자에 펼치며 아버지의 생전 소식을 전했다.

익환씨는 조카들이 내놓은 훈장을 하나씩 손으로 쓰다듬으며 "형님이 너무 고맙다"며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우리 부모님이 최고라고 자식들에게 가르쳐달라"고 당부했다.

이에 백룡씨는 "아버님이 생전에 '동물은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하셨다"며 "동네에서 서필환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익환씨는 서울에서 준비해온 사진을 조카들에게 보여줬다. 형님 필환씨가 국군에 입대하기 1년 전인 48년 촬영한 사진 속에는 멜빵을 맨 양복차림으로 한껏 멋을 낸 21살 청년이 서 있었다.

익환씨는 조카들에게 "너희 아버지는 스무살 때도 아주 똑똑한 서울 최고 멋쟁이었다"며 "너희들도 아주 든든하다"고 기뻐했다.

익환씨는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할아버지, 할머니의 얼굴은 알아야 하지 않겠냐"며 57년 찍은 부모님의 회갑연 사진을 세 장씩 가져와 조카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익환씨는 또 조카들의 이름을 집안 족보에 올리기 위해 생년월일, 한자, 이름 등을 꼼꼼하게 적기도 했다.

/뉴시스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