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전역에는 ‘구호나무’가 알뜰한 보살핌을 받고 있다. 1930∼40년대 항일빨치산들이 깊은 산 속에서 껍질을 벗기고 칼이나 먹으로 독립열망을 표어나 구호 형식으로 새겨놓았다는 나무다. 바위에 새겨진 구호 등을 통틀어 구호문헌이라고 한다.

북한은 86년부터 구호나무를 발굴하기 시작해 90년 12월 말까지 99개 시·군(구역)에서 1만2800여 건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후에도 발굴작업은 계속돼 전역에서 속속 발견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구호나무는 1961년 백두산 기슭인 양강도 삼지연군 청봉숙영지에서 19그루가 처음 발견됐으나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80년대 말 들어 갑자기 대대적인 발굴작업이 벌어졌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발굴범위가 북한 전역으로 확대되고 그 내용도 김일성·김정일을 찬양하는 쪽으로 변해 갔다.


『백두산에 김일성 장군 계승인 백두광명성 탄생』(평남 안주 입석리), 『조선아 태양성 탄생을 만방에 자랑하라』(함북 연사군 연사읍), 『백두성 5대양 6대주 비칠 붉은 태양으로 키우자』(함남 북청군 죽상리) 등이 대표적이다.

북한은 구호문헌을 주민사상교양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과학원 함흥분원 산하에 혁명사적보존연구소를 설치했는데 90년대 초 이곳에서 구호문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시약과 영구히 보존관리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했다고 보도했다. 또한 각 기관·단체와 각급 학교, 공장·기업소별로 참관사업을 조직해 누구나 의무적으로 한 번 이상 구호문헌을 견학토록 하는가 하면 구호문헌 해설사업·문답식학습·연구토론회 등을 수시로 개최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 주민들은 대부분 구호문헌을 당국이 조작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거기에 씌여진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도 별로 없다고 탈북인들은 말한다. 당역사연구소가 최선을 다 했지만 주민들의 눈을 완벽하게 속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처음 구호문헌을 발굴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그러려니 했으나 그것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고 심지어 평양의 모란봉과 대성산에서도 발견됐다고 하자 의심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수십년 전에 껍질 벗긴 나무에 새겼다는 것이 여태 남아 있다는 것도 신통하거니와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판국에 한가하게 글자나 새기고 있었다는 게 말이 되는가』라며 믿으려 하지 않았다. 또한 빨치산들이 먹(墨)을 가지고 다닐 리도 만무하고, 더욱이 강원도나 평양에까지 침투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며 심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일본의 한 식물학자가 북한을 방문한 기회에 구호문헌을 참관한 적이 있는데 50년 전에 새겼다는 구호나무의 수령이 40년도 안된 것을 발견하고 이를 지적해 관련자가 문책 당한 적도 있었다. 주민들도 구호나무를 참관하고는 『살아있는 나무는 조직이 변하는데 수십년이 지났는데 어떻게 글자가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있는가』라며 의문을 표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산기슭에 화전이나 뙈기밭을 일궈 겨우 살아가던 사람들이 인근에서 구호나무가 발견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그곳을 떠나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김광인기자 kki@chosun.com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