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논자(논자)는 남북정상회담 이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호랑이 등에 함께 탄’ 형국이라고 했다. 그러나 진짜 호랑이 등에 업힌 사람은 김 대통령이다. 김정일은 언제든 호랑이 등에서 내려오면 된다. 그는 속된 말로 밑져야 본전이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그렇지 못하다. 이제 그가 한국 국민에게 남북 문제에서 뭔가 진전된 것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가 지금까지 해온 ‘투자’는 오히려 역효과를 낼 것이기 때문이다.

남북 문제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북이 남에게 줄 수 있는 것은 평화이고 남이 북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경제지원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남이 경제지원을 현실화하지 못하면 평화와 안정은 어느 순간이건 깨질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엊그제 보즈워스 주한 미대사가 한국언론재단에서 한 연설은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북한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필요한 투자의 일정 부분은 국제 금융기관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나와야 할 상황”이라고 전제하고 “한국의 경제가 질서없고 튼튼하지도 않으며 투명하지 않다면 북한 지원에 필요한 자본을 해외로부터 끌어들이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한국의 경제가 엉망인데 무슨 여력과 ‘담보능력’으로 북한을 지원하겠느냐는 소리로 들린다.

보즈워스의 말이 아니더라도 국제사회가 북한에 투자할 때는 오로지 ‘한국’을 보고 하는 것이다. 경제논리만이 지배하는 세계시장에서 한국의 ‘담보’ 없이 북한에 투자할 기업이 있을 리 없다. 이들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한국의 경제상황이요 한국사회의 안정성이다. 이것이 불투명하거나 흔들릴 때 대북 경제지원은 사실상 어려워질 수밖에 없으며 남북관계 역시 불안정해질 것이 분명하다.

지금 한국의 경제전망은 어지럽고 어둡다. 노조 등의 강력한 반발로 금융권이나 공기업의 구조조정은 갈수록 난관에 부딪히고 있다. 북한 진출의 선봉을 맡을 수밖에 없는 대기업에 대해서 정부가 얼마나 개혁의 ‘큰소리’를 칠 수 있을는지 그것도 오리무중이다. 우리 사회는 ‘총파업’의 열병을 앓고 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대정부투쟁을 선언한 가운데 경쟁적으로 파업에 들어가고 있다. 엊그제 공권력이 투입된 롯데호텔은 마치 전쟁이 지나간 자리를 방불케하고 있다. 이런 모습들이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고사하고 외국투자자들에게 건강한 ‘담보자’의 인상을 심어주지 못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외국투자자들에게 또다른 면에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남북 정상회담 이후 외국, 특히 미국인들의 평가와 매체들의 반응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북한의 실체적 변화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리지 말고 지켜보자면서 회의적인 쪽에 한발을 걸치고 있다. 일부 논자들은 한국이 김정일에 대해 너무 “경도되고 있다”고 경계하기도 했다. 부시 후보의 참모인 전 국무차관 울포위츠는 개인적인 면모로 북의 지도자를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했다. 실제로 지금 우리 사회에는 우리 대통령은 비판하면서도 김정일은 치켜세우는 분위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반도 문제를 전문으로 다루는 돈 커크 기자는 한국정부가 6·25 기념행사에서 많은 참전용사들의 바람이었던 시가행진을 취소한 것을 두고 ‘한국인들이 한국 현대사의 진로를 설정한 위대한 투쟁(6·25)을 얼마나 하찮게 생각하는가의 증거’라고 힐난하고 ‘두려운 것은 미국인과 한국인들이 (50년 후에) 또다른 오산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사정이기에 북한에 경제적 혜택을 주고 우리의 안전과 남북공존을 도모하려는 김 대통령의 계산은 지금으로서는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 경제적 지원을 위해 필요한 대내외적 여건이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 대통령은 중대한 결심을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북한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믿고 경제협력에 동참할 국제사회가 북에 대해 객관적인 판단을 갖도록 상황을 유도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부터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주필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