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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추억] 교수들, 강의 끝나면 장마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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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1.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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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삼
/전 혜산의학대학 교수(내과) 겸 대학당위원회 비서.

내가 살았던 양강도 혜산시는 앞에 흐르는 압록강 폭이 좁아 중국이 닿을 듯 가깝다. 그래서 내륙지방보다는 살기가 나은 편이다. 구리, 니켈과 같은 금속을 몰래 강 저쪽으로 던져주면 중국쪽에서 미리 약속돼 있던 사람이 나와 건져가고 몇 푼의 돈을 던져준다. 이렇게 연명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 만큼의 수완도 없는 혜산의학대학 동료 교원(교수)들의 생활은 팍팍하고 눈물겨웠다. 나는 98년 북한에서 나오기 전 혜산의학대학에서 교무과 부과장을 맡아 교원들의 시간표를 짜는 일을 맡고 있었다. 한 달이면 한 달, 최소 한 주일이라도 고정된 시간표를 짜야 하지만 교원들의 사정이 딱하다 보니 매일 시간표를 짜야 했다. 대다수의 교원들이 오전에 강의를 하게 해 달라고 통사정을 하기 때문이다. 강의를 마치고 장마당(시장)으로 나가지 않으면 끼니를 이을 수 없었다.

북한의 과학자들이 대개 그렇듯이 우리 대학의 교원들은 평생 공부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배급이 끊기고 부터 연명을 위해 엿판같은 상자를 만들어 매고는 장마당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상자 속에는 외국 전문 서적이나 쇠붙이 등의 여러 가지 물건이 들어 있었다. 인기가 좋은 물건은 그나마 사전류였고, 학자들에게 꼭 필요한 책까지도 장마당으로 흘러나가고 마는 것이었다.

연로한 한 교수는 학생들이 볼까 시장의 으슥한 곳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학생들이나 동료 교수들은 그와 마주치면 얼른 고개를 돌렸고, 그도 고개를 숙이고 만다. 이름 높은 미생물학 교수인 권봉기 선생은 언제나 매캐한 냄새가 진동하는 실험실에 코를 박고 있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탄이나 나무를 구해 배낭에 지고 학교를 떠난다. 몇 해 전 홍역이 창궐했을 때는 백신을 만들어야 한다고 평양으로 불려가기도 했다. 세면도구를 넣은 가방 하나를 들고 갔는데 그나마도 평양역전에서 누군가 훔쳐가 버렸다며 돌아와서 허탈해 했다.

불어를 포함해서 6개 국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리인수 교수는 평양외국어대학과 소련 유학을 마친 실력파였지만 성분이 나쁜 여자와 약혼했다고 해서 평양에서 떨려나 혜산으로 왔었다. 그의 부인은 이른 새벽 빵을 만들어 역전으로 나가고, 그는 통나무 장사를 하면서 연명해 나갔다.

김동훈 간부과장은 대학에서 아무 것도 받지 못하면서 생약 판매지도원을 하는 부인에게 얹혀 지내는 신세가 됐다. 부인에게 천대받으며 복종하는 그의 모습에서 더 이상 간부과장의 위세는 찾아볼 수 없었다. 명색이 교수겸 초급당 비서였던 나 역시 나중에는 배낭에 쌀을 넣어 친척집을 원정 다니며 연명해야 했다.

98년 탈북해 중국에서 만난 남한의 형은 "너는 의사였으니 그래도 살만 했겠구나" 고 하셨다. 의사나 과학자 등이 오히려 살기 어렵다는 사실을 남한 사람들이 어찌 알까. 그래도 "후대교육을 위한 의무"라며 강의는 결코 빠뜨리지 않던 북한 동료들의 모습은 언제까지 잊을 수 없는 스산한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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