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정신은 주체사상과 혁명적 군중노선을 구현해 창조했다는 북한의 대중지도 사상을 말한다. 당초 농업부문을 대상으로 출발해 각 분야로 확대됐으며 공업부분에서는 "대안의 사업체계"로 정착했다.

청산리정신·청산리방법이라는 용어는 김일성이 60년 2월 평남 강서군 청산리(현 남포시 강서구역 청산리) 당총회와 강서군 당위원회 사업을 현지지도하는 과정에서 창조됐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청산리를 찾은 김일성은 농민들과 숙식을 같이하면서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농촌의 실정과 농사현실을 구체적으로 파악한 뒤 청산리 당총회와 강서군 당위원회를 통해 협동화된 북한 농업이 나아갈 새로운 방향과 방도로서 청산리정신과 청산리방법을 제시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여기서 청산리정신이란 청산리방법에 일관된 근본사상이며 청산리방법은 청산리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정의되는데, 북한은 통상 이 둘을 분리하지 않은 채 하나의 단어처럼 붙여 쓰고 있다.

청산리정신의 기본 내용은 인민들의 생활문제를 전적으로 책임지는 원칙에서 당적·국가적 지도를 실현하고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을 교양, 개조해 당과 수령의 주위에 묶어세우며, 모든 문제를 인민대중의 힘과 창조적 지혜를 동원해 풀어나가는 것 등으로 간추려진다.

청산리방법의 기본 요구는 ▲위가 아래를 도와 상하합심하여 당의 노선과 정책을 관철하고 ▲늘 현지에 내려가 실정을 깊이 파악해 문제해결의 올바른 방도를 찾으며 ▲모든 사업에서 정치사업, 사람과의 사업(對面事業)을 앞세우고 대중의 자각적 열성과 창의성을 동원해 제기된 과업을 수행하는 것 등이다.

북한은 1954년 4월부터 시작한 농업과 개인상공업의 협동화를 58년 8월 마무리함으로써 모든 경제를 국가의 통일적인 지도아래 계획적으로 관리운영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또한 사회주의 기초건설을 목표로 출발한 5개년계획(57∼60)이 원만히 수행됨으로써 생산규모가 커지고 생산력발전에도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반면 일선 기관·기업소의 간부들은 사무실에 안주하며 관료주의화하고 있었으며, 협동조합을 비롯한 생산단위는 방만한 관리와 계획성 없는 운영으로 비능률을 초래하고 있었다. 김일성이 청산리정신·청산리방법을 주창하게 된데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청산리정신·청산리방법은 생산효율성보다는 정치사업을, 기술지도보다는 사상적 지도를 강조함으로써 인민대중의 자각적 열성과 창의성을 떨어뜨려 오히려 경제를 어렵게 하는 한 요인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광인기자 kk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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