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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추억] 문득 떠오른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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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1.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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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이

이어폰을 귀에 꽂고 지하철로 등교를 하다가 영어 테이프를 되감기 하는 바로 그 짧은 순간, 그 얼굴들이 섬광처럼 뇌리에 비쳐들었다. 그 얼굴들은 나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쳤거나, 잊지 않고 있다가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어 점찍어 놓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 첫 사람. 사금 캐기에 한달 간 동원되어 평양을 떠나있을 때였다. 잠깐 시내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 그와 동행하게 됐다. 그 총각에 대해 떠도는 평판은 좋지 않았다. 행동이 거칠고 일도 자주 안 나오고 해서 직장에서는 그 청년을 「교양대상자」로 취급하고 있다고 했다. 나이는 나보다 한참 아래였다.

우리는 평양으로 들어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한 시간 거리의 동둑 길을 걸어갔다. 그 총각도 나도 별로 말이 없었다. 동둑이 절반쯤 끊겨 냇물이 흐르는 곳에 이르렀다. 신을 신고는 도저히 건너기가 불가능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총각 앞에서 신발을 벗기도 그렇고 발을 물에 잠그기도 뭣해 잠시 쭈뼛거리는데 총각이 신발 신은 채로 저벅저벅 물에 들어서더니 돌을 하나하나 안아다 징검다리를 놓아주었다. 총각은 밝은 웃음을 온 얼굴에 피우며 건너라고 나에게 눈짓한다. 내가 여자로 태어나서 남성에게서 받은 첫 대접이었다.

두 번째는 대학 수강실에서였다. 시험기간 빈 교실에 조용히 앉아 밤을 샐 작정을 하고 책을 읽어나가는데 자정이 되어오자 남녀 학생들이 하나 둘 들어와 붐비기 시작했다. 나는 "나 홀로 공부"를 방해한 자들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모기 콧김 만큼의 온기가 흐르는 라지에이터 옆에 의자 세 개를 나란히 놓고 잠을 청했다. 잠결에도 냉기가 몸으로 스며드는 걸 참으며 그냥 누워있는데 갑자기 어깨 위에 따뜻한 무게가 실렸다. 우리 학급 남학생이 입고 있던 가죽옷을 벗어 나에게 덮어주었다. 학교공부기간에 어머니와 아내를 잃는 비극을 겪으면서도 얼굴빛 한번 달리한 적 없어, 참 감정도 없는 사람이라고 속으로 단정지었던 사람이었다.

세 번째는 버스에서였다. 한 40분을 기다려서야 도착한 무궤도버스에 간신히 올랐는데 어찌나 사람이 꽉 찼는지 발을 옮겨놓을 틈이 없었다. 맨 나중에 올랐던 나는 결국 한쪽 발 뒤꿈치를 버스 자동문에 치이고야 말았다. 체면도 자존심도 잃고 비명을 질렀다. 버스 문은 다시 열리고 사람들이 앞으로 조여주고 하여 겨우 발을 뺐는데 발 뒤축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손수건을 꺼내 싸매고 있는데 중년의 한 남자가 "어때요? 괜찮겠어요?"하며 근심스런 얼굴을 지었다. 죽도록 아픈 그 순간에도 따뜻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가슴 찡하도록 들었다.

대학 국문학시간에 선생님은 "사랑은 문득 생각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오늘 아침, 등교길에 문득 그들이 생각난 것은 아마도 그들이 나의 마음속에 나도 모르는 사이 사랑으로 간직되어진 탓은 아닐까. 그 사랑이 있어 북한에서의 그 힘겨웠던 마흔 해의 나날들을 살아냈던 것은 아닐까.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던 그 날의 그 작은 빛들이 끝날 줄 모르는 경제난에 지금은 빛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누구도 모르게 간직했던 그 밝은 빛들이!

/이화여대 여성학대학원 석사과정·전 조선작가동맹소속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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