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8일 금강산에서 남북 이산가족이 만나고 있을 때 남한에서는 피눈물을 흘리는 두 납북자 가족이 있었다. 우리 정부가 가깝게는 지난 7월 말까지 남측 가족과 연락이 됐던 이들 납북자들을 이번 상봉에 포함시켜달라고 요청했지만 북측이 ‘연락 두절’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상봉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달 전에도 연락이 왔었는데”

28일 납북자가족모임 최성용 대표에 따르면 1975년 8월 동해상에서 오징어잡이배 ‘천왕호’를 탔다가 납북됐던 선원 허정수(56)씨는 지난 7월까지 최 대표와 남한 가족들이 북에 들여보낸 연락책을 통해 소식을 전해왔다.

연락책은 함경남도 단천에 가서 정수씨를 만났다는 소식을 중국에서 이메일로 가족들에게 전했다. ‘어민 정수’로 불리는 허씨는 하루만 출근하지 않아도 인민반장이나 담당이 찾아와서 확인할 정도로 감시를 받으며 살고 있다고 했다.

연락책을 통해 네 차례 소식이 오가자 고향과 부모, 형제에 대한 허씨의 그리움은 더 심해져 “밤잠을 이루지 못하겠다”고 털어놓았다고 전했다. 특히 아버지(92세)가 살아 있다는 소식에 “죽어도 부모 형제를 보고 죽겠다”면서 “(몸이 아파)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여생, 두려울 것이 없다”고까지 말했다고 한다.

정수씨와 같이 납북됐던 형 용호씨는 북한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정수씨가 연락책을 통해 보낸 편지에 따르면 “형(용호씨)은 2001년 11월 술을 먹고 고향과 부모 형제 생각을 이웃에게 말했다가 참혹한 시달림을 견디지 못하고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허씨는 지난 2004년 2월 첫 편지를, 2004년 4월과 2005년 11월에도 편지와 북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본지 2005년 11월 28일자 A9면>. 정수씨가 2005년에 쓴 편지에서 “(탈북을) 여러 번 시도했으나 엄격한 통제와 감시 때문에 도저히 움직일 수 없다. 아버님, 이 불효 자식 잊으시고 몸 건강히 오래 오래 사세요”라고 썼다.

최근 기자와 만나 아들 편지를 꺼내 읽던 아버지 허성만씨는 눈시울을 붉혔다. 허씨는 “아들 얼굴 한 번 보고 죽으려고 잘 넘어가지 않는 밥을 삼키며 지금까지 버텼는데”라고 했다. 또 “꿈에서도 (아들이) 보인다. 잊혀지지 않는다”며 아들 사진을 껴안았다. 아들들을 기다리던 어머니는 1989년 세상을 떠났다. 정수씨의 동생 용근(52)씨는 “2001년 최성용 대표가 납북 소식을 전해주기 전까지 정부로부터 어떤 연락도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평양에서 본 사람도 있는데”

우리측은 1995년 7월 중국 연변에서 탈북자들을 돕다가 납북된 안승운(58) 목사 가족의 상봉을 성사시키기 위해 안 목사의 생사 확인을 요청했지만 북측은 ‘확인 불가’ 통보를 해 왔다.

중국 공안당국은 사건 직후 안 목사를 납치한 북한 공작원 이경춘 등 3명을 체포했고, 중국 지린(吉林)성 법원이 이경춘에 대해 징역 2년을 선고했는데도 북한은 안 목사 납북을 부인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최 대표는 이날 안 목사가 1997~1998년쯤 평양의 봉수교회와 칠골교회에서 설교하는 장면을 촬영한 13분40여초 분량의 동영상을 북한 관계자로부터 입수해 공개했다. 북한 교회의 예배 장면이 동영상으로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안 목사 부인인 이연순(59)씨는 “남편의 설교 장면을 담은 동영상이 있고, 최근에도 평양에서 안 목사를 봤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직·간접적으로 듣고 있는데도 ‘확인 불가’라고 하는 북한이 너무 뻔뻔스럽다”고 했다.

안 목사는 봉수교회에서 3~4명의 외국인 남녀가 보이는 가운데 설교를 했으며 예배 직후 ‘북한 교인’들의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렀다. 칠골교회에선 ‘안승운 목사 환영 례배’라는 현수막 앞에서 설교를 했다.

북한은 외국인들에게 ‘북한에도 종교 자유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교회 몇 곳을 운영하고 있다. 이연순씨는 “1990년대 후반 한 인도 목사가 평양에서 남편을 만났는데 남편이 ‘나 좀 살려주세요’라는 눈빛을 보냈다고 했다”고 전했다.

◆3일 만나고 다시 기약 없는 이별

26일부터 금강산에서 열린 추석 이산가족 상봉 1차 행사는 28일 1시간여 동안의 작별 상봉을 마지막으로 종료됐다. 남북 이산가족들은 다시 닥쳐온 생이별에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22년 전 납북된 동진 27호 선원 진영호(49)씨의 남측 누나 곡순(56)씨는 동생의 손을 잡고 “이렇게 너를 놓고 가니 어떡하냐”며 통곡했다.

국군포로 이쾌석(79)씨의 남측 동생 정수(69)씨가 “내년에 내 칠순, 큰형님 팔순 잔치를 같이 합시다”라고 하자 형은 “그래, 우리 나갈 때 울지 말자”고 했으나 끝내 눈물을 떨궜다.

남측 최고령자 정대춘(95)씨는 손을 심하게 떠는 등 몸이 불편한 북측 아들 완식(68)씨의 손을 잡고 “마지막이야, 또 마지막이야”라고 되뇌었고, 완식씨는 “온가족이 모여 ’할아버지, 오셨습니까’라고 인사할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29일부터 10월 1일까지 열리는 2차 행사에서는 북측 99명이 남측 가족 450명을 만날 예정이다.
/금강산=공동취재단
안용현기자 ahnyh@chosun.com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