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이산가족은 추석을 맞아 이뤄진 상봉행사의 첫날인 26일, 반세기만의 만남의 기쁨으로 서로를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날 단체 상봉은 지난해 7월 우여곡절 끝에 완공됐으나 빈 건물로 남아있던 금강산 이산가족 면회소에서 처음으로 이뤄졌다.

이날 행사에서는 또 유종하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북측의 조선적십자회 장재언 위원장과 처음으로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북측 가족, 다소 긴장한 모습으로 행사장 도착=
0..북측 가족 200여명을 태운 평양 번호판 버스 4대가 금강산 이산가족 면회소에 도착한 시각은 이날 오후 2시35분이었다.

남자들은 짙은 회색 또는 감청색 양복에 검은색 새 가죽 구두를 신고 여자들은 분홍, 하늘색, 옥색, 금박, 벨벳 등 다양한 재질과 색깔의 화려한 한복을 입고 버스에서 속속 내렸다.

북측 의료진 4명도 함께 버스에서 내렸다. 이들은 대부분 다소 긴장한 듯 무표정한 얼굴로 잰 걸음으로 면회소 1층에 마련된 행사장 지정 좌석에 앉아 남측 가족들을 기다렸다.

행사장 테이블에는 풍천사과탄산단물 음료수 2병씩이 각각 놓여 있었다.

=남측 가족, '기대가득'=
0..오후 2시50분께 유종하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면회소 1층 로비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장재언 북한 적십자회 위원장이 반갑게 악수로 맞이했다.

유 총재는 "반갑습니다. 애 많이 쓰셨습니다"라고 인사했고 장 위원장은 웃음으로 답했다. 이들은 복도 양쪽으로 도열한 20명의 북한 봉사원들의 박수를 받으면서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귀빈 접견실로 옮겼고 뒤이어 남측 이산가족 상봉단을 태운 현대아산 버스 8대가 도착했다.

남측 가족들은 헤어진지 50년이 지난 가족들을 만난다는 설렘 탓인지 얼굴에 웃음과 기대가 가득한 얼굴로 종종걸음으로 행사장으로 들어섰다.

북한 가요 '반갑습니다'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남측 가족들이 행사장에 나타나자 상봉장은 순식간에 울음바다로 뒤덮였다.

다시 만난 형제자매, 그리고 자식을 본 기쁨으로 서로 얼굴과 몸을 얼싸 안았고 상봉장 곳곳에는 아버지에게 큰절하는 아들, 얼싸안은 자매, 큰 형님에게 인사드리는 아우 등이 눈물의 상봉 장면을 이뤘다.

="며칠 전에야 아버지 살아계신 걸 알았다"=
0..평안남도 진남포가 고향인 김기성(82)씨는 인민군 징집을 피해 1.4후퇴 당시 북측에 두고 온 아들 정현(63)씨와 순애(61)씨, 며느리 김복순(61)씨와 감격의 상봉을 했다.

헤어질 당시 아들과 딸의 나이는 네 살, 두 살.

"미안하다. 피난갈 때 못 데려가서 미안하다. 그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다"고 했던 김기성씨는 같이 늙어가는 아들을 보는 순간 목이 메었다.

아버지는 흥분했지만 초로의 아들은 눈시울만 젖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셨다"는 아들은 사진을 꺼내 북측 가족들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북에서 받은 훈장 5개도 같이 가져 왔다. 딸 순애씨는 "아버지 없이 자란다고 일을 더 열심히 해서 장군님께서 오빠에게 훈장도 많이 주셨다"고 자랑했다.

아버지가 "내가 너를 만나려고 20년 전에 신청했다가 8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이번에 왔다. 너도 나를 찾았느냐"고 묻자 아들은 "아버지가 전쟁 통에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라 찾을 생각도 안했다"며 "며칠 전에야 살아 계신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61년만에 왔는데 그리던 부인 못 만나=
0... "네가 하준이냐? 어머니는?" "어머니는 아파서 못 왔습니다."
백발로 나타난 아들을 앞에 두고 89세의 석찬익씨는 아들을 만난 기쁨보다 부인을 못 만난 아쉬움과 미안함에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아내 정태연을 만날 생각에 그 세월을 참고 기다렸는데 허리를 크게 다쳐 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황해도에 살던 석씨는 전쟁전인 1948년 스무살 아내에게 네살배기 아들을 맡겨둔 채 혼자 월남했고, 그 뒤 배가 끊겨 생이별해야 했다.

석씨는 부인과 아들을 기다리다 전쟁이 끝난 뒤 결국 재혼했다.

북측의 아들 하준(62)씨가 빛바랜 부모의 결혼사진과 어머니의 회갑연 사진을 꺼내 아버지에게 보여줬지만 석씨는 흐릿한 시력을 탓하며 안타까워했다.

대신 아들 손을 꼭 붙드는 것으로 텅빈 가슴을 달랬다.

북녘의 부인에게 끼워주려고 준비한 금반지는 아들과 함께 온 손자 광일(35)씨를 통해 전달키로 했다.

"할아버지 보고 싶은 심정은 할머니가 더 큽니다. 할아버지보다 할머니가 더 늙었습니다. 마음 고생이 많았습니다.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손자의 말에 석씨는 연방 고개만 주억였다. "61년만에 오는데 기대했었다고, 적십자에서 연락이 왔잖아 살아있다고, 그래서 기대했는데..."라며 석씨는 못내 안타까워했다.


=말 못하는 아내 이마위 점만 만지작=
0...59년전 헤어진 부인과 딸, 여동생을 만난 성백섭씨는 다른 상봉자들과 달리 내내 침묵이었다.

부인 신순희씨는 귀가 안들리고 말을 못했고 한 살 때 헤어진 딸 순덕씨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면서도 입이 마르도록 "장군님이 만나게 해준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했기 때문.

"옛날 생각이 나는데 하도 오래 돼서 정신이 무뎌졌나보오"라며 성씨는 먹먹해 했다.

성씨는 6.25전쟁이 발발한 뒤 황해도 집을 나와 해안가로 잠시 피신했던 것이 영영 가족과 이별이 됐다. 1950년 초에 낳은 딸은 이름도 지어주지 못한 상태였다.

이번에 만나면 얼마나 고생했는지, 어떻게 지냈는지 묻고 싶었으나 첫 단체상봉에서는 북측 안내요원들의 눈길 속에 마음 열고 대화를 하기 어려웠다.

"어머니가 80세가 되도록 혼자 나랑 살았어요. 작년부터 잘 못 들어요."
고생했다는 말조차 차마 하지 못한 성씨는 아내의 이마에 있는 점이 기억난다는 듯 가만히 그 점에 손을 대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 만삭상태 사망 소식에 통곡=
0... "내가 나올 때 어머니가 임신한 상태였는데. 어떻게 됐니?" "전쟁중에 폭격으로 숨졌어요."
60년만에 북측의 딸 경애(60)씨를 만난 이동운씨는 부인이 만삭인 채 숨졌다는 말에 참았던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38선 이남지역이었지만 전쟁으로 이북으로 넘어간 황해도 연백군 용도면 고향에 남겨둔 부인이었다.

1년에 쌀 400∼500가마의 소출이 있을 정도로 소지주였던 이씨는 1.4후퇴 때 홀로 배를 탔다. 다리가 끊기면서 만선이 된 배에 가족이 모두 탈 수 없었고, 더구나 만삭이었던 아내는 거동이 불편했기 때문.

사위 장기준(63)씨가 꺼내든 빛바랜 부인 사진에 이씨의 통곡은 더해졌다. 동생 5명이 이미 저 세상 사람이라는 소식에 한 번 더 억장이 무너지는 표정이었다.

60년의 생이별과 하루벌이 노동자로 살았던 험난했던 삶이 스쳐가는 듯했다.

'얌전'이라고 불렀던 딸 경애씨는 그 때 두 살이었다. 이씨는 "자나깨나 너 생각뿐이었는데 이렇게 만날지는 꿈에도 몰랐다"면서 딸의 손을 잡고 놓을 줄 몰랐다.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손을 잡은 딸도 "아버지"를 연거푸 부르면서 눈물을 참지 못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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