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국무부는 25일 공식적으로 “스티븐 보즈워스(Bosworth) 특별대표든, 성 김 6자회담 대표든 현재로선 방북 계획이 없다”고 밝히면서, 북한측이 우선 ‘6자회담 복귀·비핵화 이행’이라는 기본 원칙을 동의할 것을 재차 강조했다. 북한은 이에 앞서 보즈워스를 초청하고, 빌 리처드슨(Richardson) 뉴멕시코 주지사를 통해서도 대화를 요청했다.

오바마 정부가 이렇게 북한의 반(半)공개적인 대화 요청을 거부하는 배경에는 ‘곱슬머리의 저승사자’ 필립 골드버그(Goldberg) 대북제재 조정관이 이끄는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효력을 보고 있다는 판단이 작용한다.

골드버그가 지난 6월 26일 오바마 행정부에서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결의 1874호 이행을 담당하면서 가장 역점을 두는 것은 북한의 돈줄을 틀어막는 것이다. 자신의 후견인 역할을 해 온 리처드 홀브룩(Holbrooke)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특별대표처럼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손목을 비트는 기술이 뛰어난”(워싱턴 DC 외교 소식통) 그는 여러 차례 북한의 수상한 국제 상거래를 원천 차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각국의 고위 관리들과 금융권의 주요 인사들을 연거푸 만나면서 대북(對北) 금융거래가 수반할 수 있는 불법·위험성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 미 재무부가 이미 확보해 놓은 북한의 해외 금융 정보를 활용한다.

미국은 2005년 북한의 자금 2500만달러를 동결했던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 사건 당시에, 북한과의 금융 거래에서 의혹이 제기됐던 해외 은행들에 대한 정보를 면밀하게 파악해 놓았다. 당시 이 일에 관여했던 윌리엄 뉴콤(Newcomb)은 지난달 본지 인터뷰에서 “BDA 이외에도 의심이 가는 여러 은행이 있었다”고 말했다.

골드버그 조정관은 북한의 대외무역에서 창구로 활용되는 기업과 금융기관들을 주시해,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는 기관에 대해 해당 국가의 ‘협조’를 요청한다. 2005년 BDA가 북한의 돈세탁 창구로 지목되자, 전 세계 금융기관들은 BDA와의 금융거래를 꺼렸다.

북한의 금융거래에 연루된 동남아시아와 중국의 은행들 역시 골드버그의 ‘협조’ 요청 무시는 곧 국제금융계로부터의 고립을 자초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아 긴장할 수밖에 없다.

골드버그는 특히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치품 구입 등과 관련된 차명(借名) 거래를 색출해 내는 데도 주력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탓에, 북한의 동남아 3대 거점인 말레이시아·싱가포르·태국에서 북한의 활동이 위축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골드버그 조정관은 26일 도쿄를 방문,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대화가 아니라 비핵화 실현이라는 목표를 위한 협의”라고 말해 북한이 2005년 9·19 공동성명에서 약속한 비핵화에 나설 때까지 제재가 계속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미 국무부는 또 골드버그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보즈워스 대표의 방북계획이 없다”고 굳이 밝혀 남북한 모두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다.

북한엔 비핵화 과정에 신속히 복귀하는 것만이 대화로 가는 길이라는 점을 강조했고, 한국 정부에도 무조건 남북 대화를 재개해야 한다는 기류에 대한 오바마 행정부의 부정적인 입장을 전했다는 것이다.
/워싱턴=이하원 특파원 May2@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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