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K리포트 : 니가타 '조선학교' 방문기

▶ 2001/10/26

안녕하세요. 통한문제연구소(NKchosun.com) 김미영 기자입니다.

지난 13일부터 16일까지 일본 납북자관련 취재건으로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돌아오는 날 니가타(新潟)의 조선학교를 방문했습니다. 재일 조총련계에서 운영해온 초·중학교 과정의 이 학교는 '니가타조선초중급학교'가 정식명칭입니다.

도쿄에서 고속전철(신칸센)을 타고 2시간이 조금 넘게 달리면 동해쪽에 연한 니가타시가 있습니다. 예전 '수사본부113'같은 대공첩보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던 만경봉호가 니가타항에서 요즘에도 한 달에 두번씩 북한쪽으로 뜨고 있습니다. 조총련계 동포들이 ‘조국방문’ 때 주로 이용하는 여객선이지만 59년부터 근 10년간 9만 3339명의 재일동포들이 이 항구에서, 이 배를 타고 북송됐습니다. 그들중 98%는 북한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안고 떠난 남한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북송을 반대하는 한국 국적 동포들과 몸싸움이 벌어졌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또 일본인 납북자문제의 도화선이 된 '요코다 메구미'양이 납치된 곳입니다. 96년 한 전향 남파간첩에 의해 납치 당시 13세의 중학생이었던 메구미양의 존재가 밝혀지자 일본인들의 공분을 일으켜 왔습니다. 니가타 지역은 메구미양 송환운동이 아주 활발할 뿐 아니라 그만큼 반북적인 인식이 널리 퍼져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당시 20세 대학생이었던 하스이케씨 등도 이 곳에서 납북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바닷가에 나가서 라이터를 껐다 켰다 하면 사람이 나타나"라는 반(半)농담이 회자된다고 하는데 북한 침투조의 활동을 빗댄 말입니다.

니가타 외곽 공항근처에 있는 조선학교가 그리 좋은 상황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130~140명 정도가 다닌 적도 있으나 이제는 전체 40명 정도가 다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수가 줄어드는 것은 이 학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1955년 지금의 조총련 조직이 생길 당시 친북한 재일동포의 수는 가히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러나 70년대 역전되기 시작해 재일 대한민국 민단쪽 자료에 따르면 96년 현재 한국 국적의 교민이 조총련계의 2배쯤 됩니다.

니가타 주재 한국영사관 관계자에 따르면 니가타현에는 현재 2631명의 재일교포들이 살고 있고, 이 중 1046명이 조총련계로 분류된다고 합니다. 아직은 적지 않은 숫자입니다. 사실상 이들은 일본내에서 무국적입니다. 80년대 특별영주권을 얻을 수 있게 됐지만 북한과 일본이 비수교국이기 때문에 조총련 동포들은 해방전의 '조선적'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법적인 지위뿐 아니라 취업 등에서도 불이익을 감수하며 조선적을 유지해온 이들은 북한을 '조국'이라고 부릅니다. 북송된 친척들의 뒤치다꺼리는 물론 끊임없이 북한을 지원해야 하는 수고를 수십년째 감당하고 있는 셈입니다.

니가타시 외곽 공항 부근에 있는 조선학교에는 교문이 없습니다. 폐쇄적이리라는 선입견과 달리 잔디밭 운동장도 밖에서 훤히 보였습니다. 3층짜리 교사(校舍)는 흡사 시골의 작은 분교를 연상시켰습니다. 이 학교에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3년 과정의 학생들이 다니고 있습니다. 교원은 교장을 포함 전체 10명 정도이고 이들은 모두 조선학교와 조선대학을 나왔다고 합니다.

이 학교는 조선어를 '국어'라는 제목으로 배우고, 일본어를 제1외국어로 하고 있습니다. 조선어란 북한말을 의미합니다. 한국어와 표기법에서 미세한 차이가 나지요. 부채춤, 장고 등 민속무용을 배우고 있어 이 학교 학생이면 누구든 우리말과 전통무용, 악기를 익힐 수 있기도 합니다. 방과후 선생님들이 따로 가르쳐 준다고 합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는 교장 이신화(42)씨가 개량한복을 입은 여교사와 함께 교장실에서 며칠 전 도쿄에서 열린 무용경연대회를 찍은 비디오테이프를 보려는 참이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가 내려다보는 교장실에 앉아있자니 좀 긴장이 되더군요. 왼쪽에는 지난 2월 사망한 조총련 의장 한덕수 명의의 '우리말을 잘쓰는 모범학교칭호증' 등의 표창장이 주르르 걸려 있기도 했습니다.

교장선생은 몇 년 전 한국의 기자가 이 학교를 잠입하듯 사진을 찍어가 대서특필하는 바람에 책임자들이 낭패를 겪었다며 정 뭔가 쓰고 싶으면 제발 자신이 했던 얘기를 그대로 전해 달라고 당부하더군요. 북한과 조선일보의 미묘한 관계에는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수령을 우상화하는 혁명역사를 이 학교에서도 가르치나요?
"안 가르칩니다. 시대에 맞게 교과내용도 바뀝니다."

-북한과 독립성이 있습니까?
"독립성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기본은 어떻게 민족교육을 지켜나갈 것인가입니다. 6일중 5일은 국어를 가르칩니다. 학생들이 우리말도 잘 하고 무용이나 축구를 아주 잘해 보람을 느낍니다."

-운영은 어떻게 합니까?
"일본 정부 보조금이 없기 때문에 월 5만엔 정도의 비싼 등록금과 기부금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운영이 몹시 어렵습니다."

-조선적을 가진 학생들만 다닙니까?
"반 정도는 한국 국적을 갖고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인데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까요?
"어려워도 해야죠. 신념없이 못 합니다. 우리는 민족교육을 지켜나가자는 것이니까 일본동포들이 우리 학교를 지켜야 합니다. 니가타 교포들이 지켜야 합니다. 왜 일본에 조선학교가 있겠습니까? 30년 동안 이 학교가 존속할 수 있었고 이 학교졸업생들이 다시 선생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학교는 순수 민족교육을 하는 곳입니다. 안 지키면 민족교육이 다 없어집니다. 말도 잊어버리고 다 일본사람이 되고 맙니다. 3세 4세 5세가 나와도 민족에 대한 긍지를 갖고 살아야 합니다."

교장과의 대화를 그대로 옮기면 이런 정도입니다. 다만 한국 국적의 학생들도 다니고 있다는 것은 우리 영사관측의 견해와는 달라서 확인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교무실에는 "조선사람의 향기는 우리말의 향기 우리말의 맛풍기는 교원실"이라고 적혀 있었고, 수업이 없어 교무실에 앉아있던 한 남자교사는 "예전에 오사카에서도 한국에서 온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며 반겼습니다. 교장이 안내한 2층 교실에는 교복차림의 중학교 3학년생들이 국어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지난 날 우리 부모들은 이역땅에서 별의별 고생을 다 했다. 아 조국이여"라고 국어교사가 칠판에 적고 '토없이 쓰이는 단어들'이 무엇인지 학생들에게 묻고 있었습니다. '토'가 무엇일까, '토씨(조사)'를 말하는 것일까. 저도 궁금해졌습니다. 이들의 국어교과서에는 시와 시조, 주시경의 문법, 박지원의 양반전, 흥부와 놀부 등이 들어있었는데 북한의 교과서와는 큰 차이가 났습니다.

국어선생의 교과서에는 밑줄이 '쫙' 그어져 있거나 은유법, 활유법 등 우리가 예전에 배웠던 그 낯익은 용어들이 정성스럽게 적혀 있어 제 학창시절을 연상시키기도 했습니다. 여남은 명의 중학교 교실은 그래도 활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옆 반 초등학교 교실에는 단 두 아이가 수업을 받고 있었습니다.

노골적이지는 않았지만 북한 당창건일(10.10)을 '경축'하는 포스터와 벽장식이 군데군데 붙어있어 북한의 흔적과 냄새를 맡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몹시 말을 아끼며 성실하고 사람좋아 보이는 교장선생이 자신의 차로 공항까지 태워다 주겠다는 것을 사양하지 않았던 것은 이 조선학교가 제가 살고 있는 세계와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공항으로 오는 5분은 그것을 실감하기에 너무 짧았습니다. 자유가 보장된 일본에서 고달픈 마이너리티(소수)의 삶을 고집하는 이들의 진실은 어디까지인지 아직 잘 알 수 없지만 어쩐지 동포로서의 연민이 느껴졌습니다. 한 때 나라 잃은 백성으로 살았던 때문일까 그런 생각에서 오는 애잔함이라고 할까요.

요즘은 조총련 동포들이 한국을 자주 찾아오고, 북한에 '김만유병원'을 헌납한 의사 김만유씨도 한국을 찾아와 환대를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뜻밖에 이 학교를 방문할 수 있었던 것도 서로간에 변화의 조짐이 아닌가도 생각됩니다. 남과 북보다는 남과 조총련간의 화해가 빠른 것인지도 모릅니다.

지난 2월 저는 '김정일이 조총련에 내린 비밀 지시'를 번역해 소개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여전히 북한과 조총련조직의 불가분의 관계, 대남공작사업으로 조총련조직이 대한민국에 끼쳤던 해악은 그것대로 준엄한 현실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나라잃은 백성으로 살다가 '조국'이라고 믿고 찾아간 나라에서 온갖 고초를 겪었던 북송교포들은 물론이고, 또 북한에 간 가족들로 인해 북한과의 인연을 끊지 못했던 조총련 아니 '조선적' 동포들의 수난사에 대해서는 달리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가져봅니다.

'조총련의 오늘 또는 조총련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꼼꼼하게 취재해 다음 기회에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김미영기자 miyo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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