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면담이 계속 지연되면서 “김정일이 현 회장을 만나줄까 말까 고민 중인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현 회장이 들고간 ‘선물 보따리’가 기대보다 작기 때문일 것”(안보부서 당국자)이라는 추측이 따라나온다.

현 회장은 14일 세 번째 방북 일정을 연장했다. 15일 돌아온다면 당초 2박3일 일정이 5박6일로 되는 셈이다. 그러나 14일 오후까지도 현 회장은 김정일을 만나지 못했다.

현대아산측은 “현 회장이 13일 저녁 북측 김양건 통일전선부장과 만찬을 했다”고 밝혔다. 김 부장은 대남 정책을 총괄하는 김정일 측근이다. 통일부 관계자는 “남북정상회담 때를 제외하고 우리측 인사가 김 위원장 면담을 약속받고 방북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렇다고 김 위원장을 만나기 위해 예정된 일정을 사흘씩이나 연장한 전례도 드물다”고 했다.

면담이 계속 이뤄지지 않고 있는 이유에 대해 정부 핵심당국자는 “현 회장이 정부의 공식 입장을 갖고 간 것은 정말로 없다”며 “김정일이 현 회장 만나는 것을 계속 미루는 것도 아래 실무진들이 (현 회장을) 만나보니 별로 얻을 게 없어서일 것”이라고 했다. 이어 “그러나 고 정주영 명예회장, 고 정몽헌 회장 등으로 이어지는 현대가(家)와의 인연과 의리 때문에 안 만나기도 뭐해서 면담이 지연되는 것 같다”고 했다.

이 당국자는 “북한이 이명박 대통령의 8·15 경축사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면담을 늦추고 있다”는 일각의 관측에 대해선 “그런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김정일 선물’ 문제와 관련, 현장에서 북한을 오래 다뤄본 한 전문가는 “북한측에서 ‘알아서 성의를 표시하라’는 식으로 말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이 전문가는 “김 위원장은 억류 근로자 유성진씨를 풀어주기로 결심이 섰기 때문에 현 회장을 초청한 것”이라며 “북한이 현 회장과 유씨 석방에 따른 보상 문제로 밀고 당기기를 할 가능성은 없다”고 했다.

그런데 현 회장이 ‘알아서’ 준비한 선물의 수준이 실무진들이 봤을 때 미흡했고 김정일 면담 지연으로 이어진 것 아니냐는 추정이다. 통일부 관계자도 “유씨 석방과 현 회장의 김정일 면담은 별개로 진행됐다”고 했다.

“미국 여기자들을 풀어준 상황에서 우리측 유씨만 억류하는 것은 갈수록 북한에 부담이 됐을 것”(김용현 동국대 교수)이란 설명이다. 지금 북한은 미북관계 개선이 중요한데 클린턴 전 대통령은 평양에서 여기자뿐 아니라 유씨 석방도 요구했었다.

현 회장이 13일 김양건 통전부장을 만난 것에 대해서도 이조원 중앙대 교수는 “김정일 대신 김양건 부장 만난 걸로 만족하고 돌아가라는 신호일 수도 있다”고 했다. 현재 남북관계에서 김정일도 별로 줄 게 없고 현 회장의 ‘보따리’도 크지 않는데 무리해서 만날 필요는 없다는 설명이다.

반면 아직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는 쪽도 있다. 현대아산 관계자는 “김 위원장이 김양건 부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뒤 정리된 입장을 갖고 현 회장을 만나려는 것으로 본다”고 했다.

현 회장이 세 번씩이나 일정을 연장한 것은 북측으로부터 김 위원장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귀띔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란 추정이 나온다. 한 북한문제 전문가는 “북한 관행상 김 위원장을 만나기 전 북쪽 간부들과 충분히 논의를 해야 한다”며 “김 부장을 만나고 일정이 길어지는 것은 김 위원장을 만날 가능성이 크다는 좋은 징후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정보 당국자는 “14일 오전 현재 현 회장은 평양, 김정일은 원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면담이 성사되려면 누군가는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 평양~원산은 자동차로 2시간30여분, 비행기로는 50여분 거리다.

이날 북한 내각기관지 민주조선은 “북남관계는 최악의 상태에 처해 있다”며 그 책임은 “(남한 정부의) 반공화국 책동에 있다”고 했다. 또 유성진씨 사건을 거론하며 “(남한 정부가) 개성공업지구에서 불순한 사건을 조작해냈다”고 썼다.
/안용현 기자 ahnyh@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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