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평양으로 간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당면 목적은 이날로 134일째 억류 중인 현대아산 직원 유모(41)씨의 석방 문제지만 그것이 이번 평양행의 ‘전부’는 아닐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현 회장이 남북관계의 중요 현안 중 일부를 북측과 결정하는 사실상 정부의 ‘특사’ 역할을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특히 “북한이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처럼 현 회장을 지목해 방북을 요청”(정부 당국자)했기 때문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현 회장을 통해 대남 메시지를 전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현재 남북관계 현안 중 상당 부분은 현대그룹과 관련이 있다. 억류 근로자 문제뿐만 아니라 토지임대료 5억달러와 근로자 월급 300달러 인상 문제가 걸려 있는 개성공단 사업, 작년 7월 관광객 피살 사건으로 중단된 금강산관광, 작년 12월 중단된 개성관광 사업 등이 모두 현대그룹과 연결돼 있다. 이 때문에 현 회장이 자신의 수중에 있는 이들 카드로 북한과 협상하는 게 자연스럽고 용이할 것이란 분석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그중에서도 “특히 금강산관광 카드를 주목해야 한다”(서재진 통일연구원장)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 “금강산관광은 북한과 현대측 모두 당장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부분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정부 자료에 따르면 북한은 1998년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이후 2007년까지 금강산에서만 5억3800만달러의 현금을 벌었다. 지난해 북한의 전체 수출 규모가 11억3000만달러인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큰돈이다.

특히 지난 5월 2차 핵실험 이후 미국 등의 금융제재로 ‘달러 가뭄’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북한에는 금강산을 통한 현금 조달이 무척 아쉬울 수밖에 없다. 현대아산도 13개월째 금강산관광이 중단되면서 막대한 손실을 입고 있다. 금강산관광은 북한이 아니라 우리측이 먼저 중단을 결정했기 때문에 북측이 먼저 조치를 취한 다른 현안들보다 재개 결정이 상대적으로 더 쉬울 수도 있다.

문제는 관광객 피살 사건 당시 우리 정부가 요구했던 조건들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측은 당시 북측의 사과와 재발 방지 보장, 현장 조사 등을 요구했지만 북한은 거부했었다.

그런 점에서 북한이 지난 4일 우리측 인사로는 처음으로 현 회장에게 피살 현장을 보여준 것이 뭔가 문제를 푸는 단초가 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온다.

당시 현 회장은 사건 현장을 둘러본 뒤 “태풍과 강우 등을 지형이 너무 많이 변해서 사고 당시 모습과는 상당히 달랐다”고 했었다. 김용현 동국대 교수는 “북한이 약식으로 현장 조사를 허용하고 유감 표명 등을 한 뒤 관광 재개 의사를 우회적으로 전달할 수도 있다”고 했다.

청와대 핵심당국자도 이날 금강산관광 재개 여부를 묻는 질문에 “예단해서 말하기 어렵다”며 “어떤 형태로든 명분 있는 마무리가 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유씨를 풀어주는 것만으로는 금강산관광을 재개할 명분이 약하다는 이야기로 읽힌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이 7월 초 외신 인터뷰에서 “지난 10년간 북한에 간 막대한 돈이 핵 무장에 이용됐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고 말한 상태에서, 관광객 피살 사건에 대한 북측의 명시적 태도 변화가 없는데 북한의 ‘달러 박스’인 관광 사업을 재개하는 것은 우리 정부에 정치적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관측이다.

이 밖에 작년 12월 북한의 개성지역 출입 통제 조치로 중단된 개성관광 재개도 금강산관광과 함께 ‘패키지’로 거론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관광 사업 등 남북 경협은 북한이 이행을 요구하는 6·15와 10·4 선언에 모두 포함된 내용”(이조원 중앙대 교수)이라는 점에 주목하는 견해다.

“북측이 8·15를 맞아 금강산 이산가족 면회소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전격 제안하는 방법으로 금강산 관광의 실마리를 풀려 할 수도 있다”(청와대 당국자)는 의견도 있다.

당국자들과 전문가들은 특히 현 회장이 김정일을 만날 경우 김정일이 남북관계 전반에 대한 메시지를 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김정일이 클린턴 전 대통령을 통해 미북 관계 개선 의사를 전달한 것처럼 현 회장을 통해서도 메시지 전달이 가능하다”(국책연구소 연구원)는 것이다.

8·15를 앞둔 시점에 북측의 이런 메시지가 오고, 이 대통령의 경축사에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적극적 의지가 담긴다면 남북관계에도 ‘파란불’이 켜지지 않겠느냐는 기대 섞인 전망이다.
/안용현 기자 ahnyh@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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