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라고 하면 1930년대 김일성 항일무장경력의 한 대목부터 연상한다. 북한 주장에 따르면 김일성이 인솔하는 항일유격대는 1938년 12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일제의 토벌에 쫓기며 남만주 몽강(현 정우)현 남패자에서부터 장백(長白)현 북대정자까지 행군했다.
남패자에서 북대정자까지는 걸어서 6∼7일 정도 걸리는 거리. 유격대는 이 구간에서 영하 40도 안팎의 혹한과 굶주림에 시달리며 100여 일에 걸쳐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 행군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한다. 밤과 낮이 따로 없고 시시각각 목숨을 위협하는 긴박한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하루 20여 차례의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는데 이 행군을 일러 북한은 "고난의 행군"이라 불러왔던 것이다. 김일성의 항일전적을 반추할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고, 북한에서는 삼척동자도 아는 얘기가 되면서 이제는 하나의 신화로 굳어버린 그 행군이다.
그런데 고난의 행군은 북한 정권수립 이후 두 번 재현된다. 한 번은 50년대 중반 이른바 "8월 종파사건"으로 불리는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다른 한 번은 김일성 사후 다.
8월 종파사건은 당시 북한 지도부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던 연안파가 소련파와 제휴해 김일성 주류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사건이다. 김일성 반세기 집권사에서 최대 위기로 기록되는 이 사건은 58년 3월 제1차 당대표자회를 계기로 일단락 되는데 사건수습에 1년 7개월이 소요됐다는 것은 그 파장의 크기를 가늠케 해준다.
오늘날 북한 신문·방송 등 매체를 통해 부단히 거론되면서 일상적으로 접하는 고난의 행군은 90년대의 간난신고(艱難辛苦)를 말한다. 세 번째 고난의 행군인 셈이다. 첫 번째 고난의 행군이 100여 일, 두 번째 고난의 행군이 1년 7개월만에 종료됐다면 세 번째 고난의 행군은 무려 6년 간이나 지속됐으니 그 가혹함을 짐작할 수 있다.
북한은 2000년 10월 노동당 창건 55주년을 맞으면서 "고난의 행군"의 종언을 공식 선언했다. 노동신문(10.3)은 두 면에 걸친 장문의 정론(政論)을 통해 "한 나라, 한 민족의 역사에서나 인류사에 있어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악의 시련이었다"는 말로 지난 6년을 회고했다. 김정일도 이듬해 5월 말∼6월 초 중국을 비공식 방문한 자리에서 "조선은 이제 고난의 행군을 마치고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고 말했다.
/김광인기자 kki@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