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단풍 구경 가거나 등산하는 사람들을 보며 “왜 쓸데없이 산에 가서 힘을 낭비 하지” 라는 생각이 한국에 오고 나서도 한참동안 가시지 않았다. 어느새 주말이면 산을 오르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속으로 웃음 짓기도 한다.

남북한의 온갖 산들을 다녀 보았지만 어릴적 10년을 보낸 함경남도 요덕군 정치범수용소(15호 관리소)가 있는 병풍산과 백산은 결코 잊을 수 없다. 개인적 체험이 얽힌 곳이라서만이 아니라 그 산의 아름다움은 북한의 어느 명산 못지 않다. 일반인들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 곳이라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뿐이다.

자연의 천국속에 인간이 만든 지옥인 수용소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비극적일 뿐이다. 지금도 병풍산에는 단풍이 이름 그대로 병풍을 두른 듯 눈부시겠지만, 그 안의 사람들이 겪고 있을 가혹한 고통은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가려질 수는 없을 것이다.

요덕군은 낭림산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산악 지방이다. 특히 수용소로 선정된 구역은 산세가 기묘하고 해발 1700m 의 높은 산들이 많아 길을 잘못 들면 빠져 나오기 힘들다. 수용소 부지로는 천연의 요새인 셈이다.

외화벌이 약초를 캐기 위해 쉬지않고 병풍산과 백산을 올라 가다 허기에 쓰러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다 바람이 자작나무 숲을 스치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곤 했다. 작은 폭포들과 단풍이 빚어내는 절경속에 온갖 짐승들이 뛰놀고 심지어 곰까지 어슬렁거렸다. 원시 그대로의 맑디맑은 계곡은 열목어 산천어 등의 서식지였다. 보위부 간부들이 사냥과 낚시를 즐기는 모습을 노예가 귀족 바라보듯 쳐다보아야 했다.

최악의 식량난으로 수용소의 상황은 더욱 처참해졌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래도 산에서 열매라도 따 먹을 수 있는 가을이 견디기가 가장 낫다. 겨울이 오고 눈이 오면 뜯어먹을 풀조차 사라질 것이다.

한국에 온지 10년이 됐지만 아직도 남한의 단풍 든 산에 오르면 요덕의 병풍산을 오르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등산로를 벗어나 약초를 찾기도 한다. 그러면 내 귀에는 수용소 사람들의 절규가 생생하게 들려온다.
/강철환기자 nkch@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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