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흥남철수' 당시 상선의 선장으로서 1만4000여 명의 민간인들을 구출했던 마리너스 레너드 라루 수사(修士)가 20일 미국 뉴저지주 뉴턴의 성바오로 수도원에서 87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고 뉴욕 타임스가 보도했다.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號)의 선장이었던 라루 수사는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려 흥남으로 철수한 뒤 고립돼 있던 10만명 이상의 군인과 민간인들을 대피시키기 위한 흥남철수에 참가해 1만4000여 명의 민간인들을 구출한 공로로 한국과 미국에서 훈장을 받았다.

라루 수사는 한국전 종전 이듬해인 1954년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사로 변신해 종교의 길을 걸어왔다. 유가족은 남기지 않았다.

필라델피아 출신으로, 2차대전 당시에도 대서양의 상선운항을 맡았던 베테랑 선장이었으며 한국전을 맞아 미군의 물자 수송을 담당하고 있던 라루 선장은 흥남철수에 징발된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이끌고 1950년 12월22일 흥남 앞바다에 도착했다.

훗날 그는 '쌍안경을 든 순간 나는 가련한 장면을 목격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는 '부두에는 챙길수 있는 모든 물건들을 챙겨나온 난민들로 북적였으며 그들 곁에는 놀란 병아리들과 아이들이 있었다'고 밝혔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22일밤 공산군의 흥남진입을 저지하기 위한 미군 함정과 군용기들의 포격 및 폭격이 계속되는 가운데 가능한 한 최대의 피난민들을 태운뒤 흥남항을 빠져나와 기뢰로 가득한 바다를 통해 남으로 향했다.

라루 수사는 뒷날 회고에서 '다음날 해가 밝고서야 배에 탄 난민들이 1만4000명이나 된다는 것을 알게됐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배의 정원은 47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28시간의 항해 끝에 크리스마스 전날 부산에 닿은 기쁨도 잠시, 라루 선정을 맞은 현지 관리들의 말은 이미 너무나 많은 난민들이 들어와 있어 더이상은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거제도로 뱃길을 돌리라는 것이었다.

크리스마스에 도착한 거제도 역시 부두가 너무나 좁고 번잡해 메러디스 빅토리아는 사흘째 혹한의 밤을 먼바다에서 보내야 했다.

마침내 26일 두척의 해군 상륙함에 옮겨 탄 피란민들은 모두 무사히 거제도에 상륙했다. 많은 노약자들과 병자들이 섞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희생자는 단 한명도 없었으며 오히려 사흘간의 수송기간중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다.

미국 해사부는 메러디스 빅토리아의 성과를 '바다 역사상 단일 선박이 이룬 가장 위대한 구조작업'이라고 칭송했다. 미 의회도 한국전 이후 이 선박을 위대한 업적을 이룬 배를 의미하는 `갤런트 십'으로 지정했다./뉴욕=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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