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조선일보는 22일 윌리엄 테일러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상임고문, 윌리엄 드레난 평화연구소(USIP) 총괄기획국장, 래리 닉시 의회조사국(CRS) 아시아담당 연구원 등 3명을 초청, 좌담회를 열었다.

좌담회에서는 주한미군과 안보 문제, 남북 경협,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4강의 새로운 경쟁 등 폭넓은 주제들이 논의됐다. 좌담은 조선일보 워싱턴지국 회의실에서 강효상(강효상), 주용중(주용중) 특파원이 진행했다. /편집자

▲강효상=참석해 주셔서 고맙다.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분석과 전망, 그리고 미국의 진짜 속내를 전해주기 바란다.

▲테일러=이번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낙관적이되 주의깊게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김대중(김대중) 대통령은 비판을 이겨내며 햇볕정책을 계속 추진,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좋은 관계를 유지하다가도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나 오산(오산)에 의해 분쟁이 일어난다. 남북간 합의가 혹시 깨질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남북한 모두 신중하게 대응해야 한다.

▲닉시=이번 정상회담은 50년 만에 분단의 다리를 건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고, 앞으로는 정상회담이 열리기가 쉬워질 것이다. 또 지금까지 대북외교에서 상대적으로 주변부에 있던 남한이 주도권을 쥐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남한이 계속 대북외교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느냐 여부는 정상회담 합의사항의 이행에 달렸는데, 무엇보다 이산가족과 경협을 한차례 이벤트로 그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확대시키고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만 내가 염려하는 점은 ‘정상회담 이후’가 주로 평양의 결정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지금 ‘쇼핑’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상황에 따라 가장 좋은 흥정의 조건을 제시하는 상대를 고르고 있다. 일본이나 미국에 다시 접근하고, 또 한국에 되돌아오고 할 것이다.

▲주용중=정상회담 후 남한내 반응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닉시=북한의 대남 정책이 아직 불명확하다. 카드게임에 비교하자면 북한은 자신이 쥐고 있는 카드의 상당부분을 아직 내보이지 않고 있다.

▲테일러=김정일에 대한 지금까지의 이미지는 부정적인 것 일변도였다. 김일성은 과거 북한을 방문한 나를 7시간 동안 만났는데, 아들인 김정일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말했다. 제왕학을 가르친 것이다. 황장엽은 망명하기 전 자신이 가르친 학생 중 김정일이 가장 영리하다고 나에게 말했다. 이번에 김 대통령도 놀랐을 것이다.

▲강효상=김정일에 대한 이미지는 과거나 지금이나 마치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방영하는 데 따라 형성돼 왔다. 이미지보다는 실체가 중요할 것 같은데….

▲닉시=맞는 말이다. 김정일의 이미지는 초기에는 무책임한 플레이보이로 그려졌고, 이어 비합리적인 지도자라는 점이 부각됐다. 지금은 ‘친절한 톰 아저씨’로 부각되고 있다. 미국에서도 과거 스탈린을 ‘친절한 톰 아저씨’로 여겼던 그룹들이 있었다. 분명한 것은 김정일이 영리하고 정치조작에 능하다는 점이다. 그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한 상황에서 대화가 진행돼야 한다.

▲테일러=북한은 이번 회담으로 남한내 일각에서 자리잡고 있던 반미감정을 촉진시킬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벌써 주한미군에 대한 논란이 가속화되고 있다. 미군이 주둔해야 하느냐, 철수해야 하느냐는 문제보다는 주둔군 규모와 기능, 지휘부 등 사항을 어떻게 조정할 것이냐가 향후 토론의 중심이 되는 게 바람직하다.

▲드레난=북한은 지금까지 보안법 철폐,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지금은 ‘유혹’의 방식으로 이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 같다. 남북한을 기업합병에 비유하면, 지금 주변 강대국이 한반도에 초미의 관심을 갖고 있다. 마치 구한말 4강이 각축하는 시대와 같다. 한국으로서는 화해의 시대, 통일의 시대로 가는 길목에서 국제정치학에서 말하는 ‘안보 딜레마’를 어떻게 확보할 것이냐, 주한미군이 만일 철수하는 경우 한반도, 동북아, 아시아의 안보질서를 어떻게 형성할 것이냐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할 시점에 이르렀다.

▲테일러=중국은 형제국인 북한이 미국과의 사이에서 완충지대로 남기를 바란다. 미국도 적어도 일정 기간은 통일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데, 동북아에 주한미군을 이동시킬 장소가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도 마찬가지 입장이다. 김 대통령은 이 때문에 시종일관 국토통일이 아니라 평화공존을 말하고 있다. 앞으로 김정일이 서울을 방문하고 남북한의 정당, 사회단체가 각기 대화를 시작하면 긴장을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점에 오히려 더 조심해야 한다.

▲닉시=앞으로 주한미군 논쟁은 더 가속화될 것이다. 미국 정부와 군은 현재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고 있지만 그럴 경우 많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재래식 무기 감축이 물밑에서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주제가 정식으로 탁상에 오르면 주한미군에 대한 논의가 필수 불가결하다. 남북한 관계가 진전된다면 주한미군의 규모, 구성 등을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미국으로서는 현재 반미감정을 악화시키고 있는 한미 행정협정(SOFA), 노근리 사건, 매향리 사건에 대해 더 진지하고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야 한다.

▲드레난=70년대 말 카터 행정부가 주한미군을 철수하려 했을 때는 미 의회가 이를 막았다. 80년대 한국에서 반미감정이 고조되자 미 의회 주요인사들이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는데, 당시에는 행정부가 이를 무마시켰다. 남한에서 반미감정이 계속 고조될 경우 한미 방위조약이 튼튼하다는 미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행정부와 의회가 모두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곳에 있을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많은 한국인들은 주한미군이 철수할 리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필리핀의 예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테일러=반미감정을 정확히 분석해야 한다. 미국 국기를 불태우고, 대사관에 화염병을 던지는 것은 반미감정이지만, 미군의 일부를 휴전선(DMZ)에서 후방으로 이동시키라든가, 3개 F16 비행대대 중 한 대대를 철수하라든가, 김 대통령도 한 차례 언급한 바 있는 미군의 평화유지군 전환 제안 등은 반드시 반미라고 할 수는 없다. 앞으로 주한미군에 대해 점점 다양한 접근이 나올 것이다.

▲강효상=재래군비감축이나 반미 같은 미묘한 문제들에 대한 미 정부의 대응은 무엇인가?

▲닉시=한국내 반미운동 고조는 미국의 안보공약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고, 아마도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이번 방한에서 이 문제가 거론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재래식 군비 감축 문제에 대해 클린턴 행정부는 아직 분명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테일러=현재까지 미 정부의 입장은 가까운 장래에 군비축소를 하는 것은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미 합참의장도 최근 이 점을 분명히 언급했다.

▲드레난=미군의 철수 문제로 직결될 군비감축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북한이 어떻게 반응하고 나올지 모르지 않는가? 쉬운것부터 시작한다는 남한 정부의 입장에 찬성한다. 80년대 말 각각 20만명씩 감군부터 하자고 했던 김일성식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주용중=주변 4강의 새로운 이해관계가 어떻게 전개될 것으로 보는가.

▲드레난=과거 100년간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입장이 지금처럼 충돌없이 일치된 적이 없었다. 또 현재 남한에는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정권이 들어서 있다. 비록 전술적이라 할지라도 김정일이 이 기회를 잡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들은 변화할 수 있고 또 변화할 것이다. 주변상황이 비우호적으로 변할 경우 남한정부가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한반도 안정보장에 중요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닉시=이번 정상회담으로 가장 영향력이 커진 것은 물론 중국이다. 북한이 진정한 개혁으로 나간다면 중국의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이다. 한반도 문제에 다시 개입, 발언권을 행사하려는 러시아의 최근 움직임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이번 회담이 일·북 관계에 큰 변화를 불러올 것 같지는 않다.

▲주용중=미·북 관계는 앞으로 진전될 가능성이 있는가.

▲테일러=미국의 대북외교 공식입장인 페리계획안은 앞으로 험난한 시련과정을 거칠 것이다. 북한이 핵이나 미사일을 포괄적으로 포기해야 한다는 큰 목적을 상정하고 있지만 북한 반응은 아직 밋밋하다.

▲드레난=무엇보다 오는 8월의 이산가족 상봉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가 큰 변수다. 이산가족 상봉은 이번 회담 합의사항 중 가장 구체적인 스케줄과 일정이 잡혀있어서 남북한 관계 진전 과정의 시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리=주용중기자 midwa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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