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김정일의 악수’, 그 핵심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김정일 위원장이 무엇인가를 돌연 바꾸기로 결정했다는 사실 그것이다.

70년대의 ‘6·23선언’ 이래 남쪽은 일관되게 남북 간의 상호인정, 상호불가침, 공존·교류, 선(선) 평화정착·후(후) 통일추구를 제의해왔다. 그러나 북쪽은 대한민국의 국가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계속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중심의 현상 타파적 통일논리에 더 집착했다.

이번에 김정일이 김대중 대통령을 그토록 예우한 것은 결국 남북 간의 ‘국가수준 공존’을 요구한 우리의 오랜 주장에 북한이 눈을 돌렸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이번 사태는 70년대 ‘6·23선언’부터 90년대 ‘햇볕’에 이르기까지의 우리의 일관된 ‘남북 공존’ 논리가 40년 만에 일부 먹혀든 것이지, 남쪽의 그간의 논리에 시행착오 이상의 본질적 오류가 있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번 정상회담은 ‘문제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의 시작’이다. 남북의 양김씨는 이제 호랑이 잔등 위에 함께 탄 격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어려운 것은 남쪽이나 북쪽이나 ‘변화’와 ‘계속성’이라는 두 상반된 요청을 어떻게 적절히 조정하느냐 하는 문제다. 북쪽은 워낙 일사불란한 체제라서 최고지도자가 엄지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키기만 하면 모두가 일제히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게끔 만들어져 있다. 그래서 ‘계속성’과 ‘정체성’을 확실하게 유지한 채 갑작스러운 ‘변화’를 추구하는 일이 남쪽에 비하면 한결 쉬울 수도 있다.

그러나 남쪽의 다원화된 고도 산업사회야말로 ‘계속성+변화’라는 고차방정식을 행여 섣부르게 다루었다가는 그 결과는 주워담기 힘든 낭패가 될 수도 있다. 한반도 패러다임의 획기적인 ‘변화’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계속성’과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 김 대통령은 그래서 장밋빛 성취감 못지않게 아슬아슬한 위기의식도 동시에 느껴야 한다.

이런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바로 우리사회의 가치관의 혼돈이요 갈등이다. 쾅쾅 터지고 깨지고 날아가고… 하던 끔찍한 일들과 줄곧 연결지어 그려지던 김정일 위원장이 지금은 남쪽 TV와 신문, 광고, 디자인, 세일즈…의 ‘수퍼스타’로 데뷔해 있다.

두뇌회전이 빠르고, 거침없이 말하고, 국제감각이 뛰어나며, 웬만한 것은 다 “하자”고 호응해오는 ‘광폭 인덕(광폭 인덕) 정치’의 탁월한 지도자로 칭송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남쪽의 청소년, 중장년, 노인, 아저씨, 아주머니, 보수파, 진보파, 친(친)정부, 반(반)정부, 6·25 세대, 사이버 세대…는 온통 각자 나름의 흥분과 충격과 혼란에 휩싸여 있다. 논리의 ‘선후(선후)’ ‘상하(상하)’ ‘표리(표리)’를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군(군)은 주적(주적) 개념을 어떻게 재조정해야 할지 고심하는 것 같고, 학동(학동)들에게는 이 사태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도 간단치 않다.

그래서 할아버지·아버지 의견 다르고 아들·손자 반응 다른 작금의 가치관 갈등은 그야말로 과도기적인 현상이라기에는 너무나도 만만찮은 ‘퍼즐(puzzle)’이다. 김 대통령은 이 퍼즐을 책임지고 가지런히 해놓아야 한다. 그러려면 김 대통령 자신이 ‘마음의 과식(과식)’을 피해야 하고 국민에게 과식을 시켜서도 안된다.

뿐만 아니라 남쪽 사람들은 어쩌면 정상회담을 고비로 남북의 공존 못지않게 남쪽 내부에서의 공존을 더 익혀야 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우리는 집안에서 공존보다는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싸움에 더 친숙해왔기 때문이다.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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