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북한에 억류됐던 미국인 중 이번 여기자들처럼 북한 법정에서 형이 확정된 사례는 없다. 1994년 12월 17일 북한 영공에서 피격돼 붙잡힌 주한 미군 헬기조종사 보비 홀 준위는 미·북 협상을 통해 2주일 만인 12월 30일 무사히 풀려났다.

1996년 8월 26일 압록강을 건너 북한에 들어갔던 한국계 미국인 에번 헌지커는 “북한 내부 형편을 탐지할 목적으로 비법(불법) 침입했다는 것을 인정”(조선중앙통신)했지만 재판은 받지 않았다.

석 달 뒤인 11월 말 빌 리처드슨 당시 하원의원이 평양에 들어가 그를 데리고 나왔다. 당시 북한은 10만달러의 벌금을 요구했고 결국 헌지커의 호텔 비용인 5000달러만 지불하는 것으로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1968년 1월 동해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에 강제 나포당한 미 정보 수집함 푸에블로호의 선원 82명도 재판 없이 정치적 협상을 통해 11개월 만에 풀려났다.

반면 베네수엘라 공산당원인 알리 라메다(Ali Lameda)의 경우, 1966년 스페인어 통역으로 북한에서 일하다가 체제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기소돼 20년의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고 실제 6년을 복역했다.

그는 재판도 없이 1년 이상 구금됐으며 사리원 근처 노역장에서 강제 노동을 했다. 1974년 추방된 뒤 라메다는 “그 감방은 하룻밤에 5분간만 스팀이 나오는 파이프 하나를 빼고는 온열(溫熱) 장치가 없었다”며 “유리창이 얼어 깨지고 내 발도 얼었다”고 증언했다.

1999년 일본인 은퇴 기자인 스기시마 다카시(杉島高志)가 녹음기와 카메라로 북한 정보를 수집했다는 혐의로 체포됐지만 2년 뒤 석방돼선 “편안한 구금 시설에서 지냈고 고문은 없었다”고 했다.
/안용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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