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충남 천안의 바울선교교회에서 김성은 목사(왼쪽부터 두 번째 안경 쓴 사람)가 탈북자 신자들과 함께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태국을 거쳐 2008년 초 입국한 북한이탈주민(탈북자) 수민(여·26·가명)씨와 성호(25·가명)씨가 김성은(44) 목사를 찾아온 건 8개월 전이었다. 한국에 와서 연인이 된 수민씨와 성호씨는 탈북자 정착지원 기관인 하나원에서 나온 뒤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고생하다가 “천안에 가면 탈북자들을 도와주는 목사가 있다”는 소문만 믿고 무작정 김 목사의 ‘바울선교교회’에 찾아왔다.

“절 보고 왔는데 어떻게 거절합니까? 지난달에 결혼식을 올려주려고 했는데. 교회 형편이 어려워 미뤘습니다만 형편이 풀리는 대로 식을 올려줄 겁니다.”

바울선교교회는 천안시 쌍용동 주택가 상가 건물에 있다. 100㎡(30평) 남짓하다. 김 목사는 교회 한쪽에 나무 합판을 세워서 6.6㎡(2평) 크기의 골방을 만들어 두 사람이 머물게 했다. 지난달에는 출산 3개월을 앞둔 수민씨를 배려해 자신의 임대아파트를 두 사람에게 내줬다. 이후 김 목사 가족은 교회에서 먹고 잔다.

이곳에 정기적으로 나오는 탈북자 교인은 20여명이다. 교인 말고도 숱한 탈북자들이 도움의 손길을 찾아 이곳에 온다. 김 목사는 그들에게 종교를 묻지 않는다. 교회라기보다 ‘쉼터’에 가깝다.

수민씨는 “나는 대학에 입학해 북에서 배운 간호학을 다시 배우고 있고, 남편도 간판업체에 취직했다”며 “목사님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우리가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김 목사는 전북 군산 출신이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2000년, 평신도 신분으로 자신이 다니던 교회 목사를 따라서 두만강 유역에 선교하러 갔다가 북한 인권 문제에 눈떴다.

“강을 따라 하루에도 수십구씩 굶어 죽은 시신이 떠내려왔어요. 강가에 서 있는데 남자 아이가 다가와 옷깃을 잡고 말을 걸었어요. ‘같은 동포끼리 같이 삽시다’ 라고. 누더기 옷에, 손이 갈라진 논바닥처럼 어찌나 거칠던지.”

두만강변의 ‘꽃제비’들을 잊지 못한 김 목사는 귀국 후 신학교에 다니면서, 중국을 떠도는 북한 주민들을 남한에 데려오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헌 옷을 모아 그들에게 나눠주는 일도 했다. 옷가지 수백벌을 넣은 대형 여행가방을 좌우로 목에 건 채 중국 땅을 헤매길 수차례. 옷 가방을 나르다 생긴 목 디스크 수술로 김 목사 목뼈엔 철심 6개가 나란히 박혀 있다.

아내 박 에스더(39)씨를 만난 것도 2000년 중국에서였다. 박씨는 북한에 남은 가족들이 피해를 입을까봐 ‘에스더’라는 이름을 쓴다. 박씨는 “나는 인민군 여자 중대장이자,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밤낮을 안 가리고 한달 동안 김일성 동상 앞을 지킨 열혈 당원이었다”고 했다. 그런 박씨가 탈북을 결심한 것은 1999년이었다.

식량 부족으로 300만명 안팎이 아사(餓死)한 ‘고난의 행군’ 때, 과학자였던 박씨의 아버지가 굶어 죽은 것이다.
김 목사는 박씨를 조선족 여성으로 위장해 한국에 입국시킨 뒤 자수하게 했다. 그는 박씨와 결혼했고, 2006년 정식으로 목사가 됐다.

이후 부부는 천안 나사렛대학교 강의실을 빌려 탈북자 교인들과 예배를 드리다 2007년 지금 자리로 이사왔다. 지인이 보증금 1000만원을 선뜻 빌려줬다. 건물 주인도 “좋은 일 한다”며 월세를 깎아줬다.

김 목사는 수시로 탈북자들을 차에 태워 서울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가서, 탈북자들이 중국에 있는 가족을 불러오기 위해 서류 작성하는 것을 돕는다. 한국 물정에 어두운 탈북자들과 함께 은행, 병원, 관공서도 숱하게 드나든다. 그는 “한 달 교회 운영비(250만~300만원) 중 평균 20%가 기름값”이라고 했다.

김 목사 교회의 수입원은 부인 박씨가 북한 관련 강연을 해서 벌어오는 돈과 월 100만원 안팎의 소액 후원금이다. 교회 집기도 사연 없는 물건이 없다. 호떡장수 교인이 25만원짜리 중고 보일러를 기증하고, 선배 목사의 딸이 20년 넘게 쓰던 피아노를 선물하는 식이다.

아픔도 있었다. 2002년 8월에 태어난 아들은 뇌성마비를 심하게 앓았다. 작년 1월 27일 저녁, 김 목사 부부는 아이에게 우유를 먹여 놓고 후원자가 될 사람을 만나러 집을 나섰다 밤늦게 귀가했다. 이튿날 새벽, 아이가 불덩이처럼 열이 올랐다. 급히 달려간 대학병원 의사는 “우유를 토한 것이 폐로 들어가서 숨을 못 쉬었다”고 했다.

김 목사는 목이 메어 말을 멈췄다. “아들을 먼저 보내고 나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한 회의가 많이 들었어요. 이렇게까지 하면서 탈북자들을 도와야 하나. 그렇지만 막다른 곳에 부딪혔다고 절망할 때마다 기적처럼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줬지요.”

지난 15일 오후 6시, 반백의 중년 부부가 김 목사를 찾아와 얇은 봉투를 내밀었다. “우리는 안성에 사는 사람들인데, 이 교회 사연을 들은 독지가로부터 ‘대신 후원금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찾아왔다”고 했다. 김 목사가 건물 주인으로부터 “사글세를 전세로 돌려 달라”는 요청을 받고 고민하던 차였다.

김 목사는 ‘작은 정성’이겠거니 하고 감사 인사와 함께 봉투를 받았다. 부부는 이름도,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총총히 교회를 나섰다. 김 목사가 이들을 배웅하고 봉투를 열자 6000만원짜리 자기앞수표 1장이 들어 있었다. 김 목사가 뛰쳐나갔지만 부부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김 목사는 “그분들의 귀한 뜻이 헛되지 않도록 아내와 함께 더 열심히 탈북자들을 돕겠다”고 말했다.
/천안=이석호 기자 yoytu@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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