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족. ” 이것이 이번 남북정상회담과 6·15 남북공동선언에 대한 러시아 입장이다. 공식 입장 표명이 신중하다 못해 느려 터지기로 악명높던 러시아 외무부도 이번만은 매우 신속하게 매일같이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입장을 “대만족” “대환영”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발표했다. 심지어 알렉산드르 로슈코프 외무부 아태담당 차관은 정상회담 기간 내내,“이번 남북정상회담 결과는 러시아 국익과 일치하는 것이다”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 같은 모습은 크렘린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 크렘린궁 외교담당 고위관리는 “만세를 부르고 싶었다”는 표현을 사용하기까지 했다.

이런 러시아의 만족 표명은 결코 외교적 수사에 불과한 덕담(덕담)이 아니다. 로슈코프 차관 말 그대로, 진실로 러시아는 “‘외세가 배제된 상태’에서 남북한 간 직접 대화가 시작됐다는 점에 깊은 만족감을 느끼고 있으며, 이는 러시아의 이해관계에도 부합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의 대(대)한반도 영향력은 계속 약화돼 왔다. 북한은 이데올로기적으로 탈바꿈된 채 경화(경화) 결재를 요구하는 러시아에게서 배신감을 느꼈으며, 이로 인해 러시아는 대북 영향력을 급속히 상실해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대북 영향력을 지니지 못한 러시아는 한국에게도 무시당하기 시작했으며, 급기야는 ‘4자회담’에서 배제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 러시아 외무부의 자체 분석이다. 그 결과 “러시아는 지난 10년 동안 한반도 국제 논의 구조에서 사실상 배제된 채, 미국·일본·중국이 영향력을 휘두르는 것을 먼 발치서 구경만 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됐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급속히 회복시킬만한 특별한 수단이나 계기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 정상회담으로 남북 직접 대화가 진행되면서 외부세력의 영향력이 급속히 감소되기 시작한 것”이다. “어차피 우리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면, 상대방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것도 하나의 전술이며, 또 성과”라고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또 러시아는 이번 정상회담으로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예상되는 남북 경제협력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북한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과거 소련이 건설해 준 북한 공장 재가동 문제가 필수적인데, 이 과정에 러시아 기업이 개입할 여지가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 시베리아 가스관을 북한을 경유, 한국에 연결시키는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러시아가 이번 한러 정상회담으로 얻었다고 판단하는 최대 성과는 무엇보다도 ‘김정일의 폐쇄적 이미지 개선’이다. 크렘린궁 관리들은 “이번 남북정상회담으로 김정일의 대외 이미지가 크게 개선됐으며, 이제 미국은 탄도탄 요격 미사일(ABM)협정 개정 명분으로 더 이상 북한을 거론하기 힘들게 됐다”고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관리들은“푸틴 대통령이 7월 19일 북한 방문시, 북한 장거리 미사일과 관련된 획기적 성명이 발표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다”고전하며, “그럴 경우 북한 위협을 명분으로 한 동북아에서의 미국 일본 군비 증강 논리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현재 러시아는 미국의 ABM협정 개정 노력 저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러시아가 그나마 미국에 맞설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공포의 핵(핵)균형’인데, ABM협정 체제가 붕괴되면 이 마지막 보루인‘핵균형’이 무너지게 된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이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핑계로 ABM 협정 개정을 요구하고 있으니, 러시아로서는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말썽꾸러기’북한이 ‘전향적 모습’을 보여줘, 미국의 명분을 근거로부터 붕괴시키고 있다고 판단하며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러시아 외교 관리들은 “만약 푸틴이 7월 방북을 통해, 김정일로부터 북한 미사일과 관련된 ‘어떤 약속’을 얻어내는데 성공한다면, 그리고 이 ‘선물’을 들고 G8정상회담이 열리는 일본 오키나와를 방문할 수 있다면…”이라는 ‘큰 기대감’을 애써 감추지 않고 있다.

/모스크바=황성준기자 sjhwa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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