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11일 중국 칭다오 한국국제학교에 진입한 뒤 한국 공관에 인도된 탈북자들이 이날 오전 학교 담장을 넘고 있다./연합자료사진

'북송 재일동포는 북한에서 절망하고, 돌아온 일본에서 실망했다.'

일본 교도통신은 7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느 곳에서도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한 북송 재일동포 출신 탈북자의 삶을 조명했다.

재일동포였던 김철수(가명)씨가 부모를 따라 니가타(新潟)항에서 북한 청진으로 향하는 배를 탄 것은 1960년대 초.

당시 김씨의 부모는 북한이 천국이라고 믿었지만 지저분한 '귀국선'과 변변치 않은 식사를 보고는 곧바로 환상이 깨졌다. 이들을 환영한 북한 어린이들은 해진 옷을 입고 있었으며 알루미늄 그릇에 담긴 밥은 파리로 뒤덮여 있었다.

김씨의 가족은 북부지방에 보내졌고 부친은 직장에 배치됐으며, 김씨는 학교에서 재일동포 출신이라는 이유로 놀림을 받아야 했다.

그의 부친은 공장의 책임자 자리까지 오르고 노동당원이 됐지만 작업장 사고로 사망, 모친이 대신 일거리를 찾아 나서야만 했다. 그녀는 고달픈 삶 속에서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몰래 흐느꼈다.

김씨 역시 대학 졸업 후 결혼한 아내에게 "토스트에 버터를 듬뿍 발라 먹고 우유를 마신 뒤 최고급 담배를 피우는 것이 꿈"이라고 말하면서 일본에서라면 그런 삶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북송 가족의 고난은 1980년대 말 배급이 줄어들면서 가중됐다. 이전 하루 1㎏였던 배급은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1994년 이후 완전히 끊겼다.

김씨는 가장 먼저 굶어 죽은 사람이 음식을 구하는 방법을 몰랐던 지식인 계층이었고, 그 다음이 도움을 청할 길이 없는 북송 재일동포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웃의 북송 교포 가족의 죽음을 목격하고서 탈북을 결심, 가족과 함께 두만강을 건넜다.

그러나 꿈에도 그리던 일본행은 쉽지 않았다. 베이징 주재 일본 대사관에서는 귀국을 청하는 김씨의 전화를 받고는 "불가능하다. 전화가 도청되고 있으니 제3국으로 나가서 일본 대사관을 찾으라"고 답했을 뿐이다.

이후 3년간 김씨의 가족은 중국 동북지방과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 한국을 거쳐 몇 년 전에야 겨우 일본에 도착했다.

그들은 재일본대한민국중앙민단 측으로부터 생활비 10만엔을 지원받고 공장 기숙사에 보금자리도 얻었지만 일본에서 자리를 잡기까지 삶은 녹록지 않았다.

김씨는 "일본에서 행복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일본 정부는 우리를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며 "일본은 기대에 훨씬 못 미친 국가였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어 "일본은 꿈의 나라였지만 돌아와 보니 그렇지 않았다"면서 "이곳에서는 환영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 1959년부터 1984년까지 9만3천명의 재일동포가 북송선을 탔으며 이 가운데 170명이 탈북해 귀환한 것으로 알려졌다./연합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