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정상이 서명한 5항목의 ‘공동선언’은 화해와 통일을 향한 귀중한 첫 걸음이라고 기록될만 하다. 역사적인 정상회담, 그리고 회담에서 얻어진 합의를 기초로 한반도에 평화와 안정의 구조가 깊숙이 뿌리내릴 가능성이 생겼다. 남북한 당사자뿐 아니라 주변국에 있어서도 이는 환영할만한 큰 전기(전기)다.

하지만 지금부터 전개될 앞길은 결코 평탄하다고 할 수 없다. 실제로 공동선언에 담겨진 사항을 하나하나 실행에 옮겨가는 작업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공동선언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사항, 예컨대 구체적인 한반도 군비축소 등의 과제가 돌출돼 나올 가능성을 감안하면 남북간에 갈등과 의견대립이 빚어질 사태도 충분히 예상된다.

무엇보다 현시점에서 북한이 진심으로 화해와 평화통일에의 여정(려정)을 선택했다고 확신할만한 근거를 우리는 갖고 있지 못하다. 확실히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그동안 국제사회가 갖고 있던 ‘이상한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상당한 정도 불식하는 데 성공했다.

합리적인 판단력을 갖고 있으며 충분히 교섭상대로 삼을 만한 인물이란 이미지를 김 위원장은 얻어냈다. 김 위원장에게도 이젠 ‘다른 나라 지도자라면 당연히 할 행동’을 할 것이라는 예측 가능성이 어느 정도 생겼다. 변화는 분명히 있다. 적극적 외교노선에 의해 김 위원장이 직접 국제무대에 등장하게끔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긍정적인 변화이며 앞으로도 지속될 것인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그것 자체가 한반도 화해와 통일에 대한 북한의 자세변화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북한의 대외 정책과 자세를 주시하는 신중한 자세다. 적어도 반년에서 1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정도의 시간을 두고 차분하게 북한의 태도를 판단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남북문제는 현실적으로 당사자 사이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 것만은 아니다. 특히 안전보장처럼 주변지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는 주변 국가에서 지지를 어떻게 얻어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이런 점에서 한국과 일본·미국과의 관계는 여전히 중요하다.

정상회담에서 주목할만한 포인트는 많지만 공동선언 제2항, 즉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가 공통성이 있음을 확인하고 그 방향으로 통일을 지향키로 한’ 항목이 나로선 가장 인상깊다. 한반도 통일문제가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평양에서 돌아온 김 대통령은 귀국 보고에서 북한이 최근 통일방안에 중대한 수정을 가하고 있음을 알렸다. 즉 ‘고려연방 민주공화국’ 제도의 기반에서 그동안 중앙정부 권한에 포함시켰던 외교·군대통수권을 남북한 각 지방정부가 그대로 보유할 수 있도록 궤도수정했다는 것이다. 이는 협의·협상에 의한 통일의 실현 가능성이 과거보다 훨씬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통일이란 김 대통령도 분명히 했듯이 적화통일이나 흡수통일이 아니다. 즉 ‘하나의 제도에 의한 하나의 국가’라는, 전통적인 통일의 개념이 아니라 ‘남북한간 제도화된 평화공존의 상태’에 통일한국이라는 관(관)을 씌우는 전혀 새로운 개념에 근거한 통일을 말한다. 이런 새로운 형태의 통일은 확실히 실현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같은 관점에서 보면 남북 정상이 통일방안의 면에서 합의를 본 점은 가장 주목해야 할 포인트중 하나다. 서로의 통일방안에 공통성이 있음을 인정함은 물론 통일을 지향한다는 목표 아래 ‘국가와 국가가 평화적으로 공존한다’는 것을 목표로 설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남북 두 정상이 이번 회담에서 ‘하나의 제도에 기반하는 완전한 통일’을 뒤로 미룬다는 원칙에 완전한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분석한다.

이는 물론 주변 각국에게도 환영받을 것이다. ‘하나의 제도에 의한 완전한 통일’은 아무리 평화리에 실현되더라도 그 과정에서 많은 혼란과 불안정을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 무엇보다 다대한 부담을 남북 당사자는 물론 주변국에까지 부담지울지 모르기 때문이다. 55년을 기다려온 역사적인 첫 만남에서 두 정상은 대단히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

/시즈오카현립대학 교수

◈ 이즈미 하지메

-49세·주오(중앙)대학 정치학과

-연세대학 대학원(정치학)

-일본 평화·안전보장연구소 주임연구원

-미국 하버드대학 고등연구원

-미국 평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주요 논문 ‘중국인민지원군의 철수와 김일성의 권력기반확립’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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