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을 남다른 마음으로 치러낸 사람이 요리 연구가 한복려씨다. 조선왕조 궁중음식 무형문화재 황혜성씨 맏딸로, 어머니 솜씨와 이론을 고스란히 대물림한 그는 14일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 참가자 220명에게 낸 답례 만찬에 8개 코스 정찬을 차려냈다. 참깨 한 톨에서 마늘 한 쪽, 소금까지, 고스란히 한국서 가져간 재료로 2000년 한국의 최고 수준 음식문화를 보여주는 자리였다.

“북한의 생활 음식을 못 보고 온 것이 아쉽습니다만, 연회용 고급 음식을 통해 북한 음식 문화의 성격과 특징은 눈치챘습니다. 55년 동안 모르고 지내온 우리 반쪽의 생활 문화를 찾기 위해 곧 ‘북한음식 연구회’를 발족할 생각입니다. ”

과연 듣던 대로 간은 싱거웠고 맛은 담백했다. “사흘째 되니까 비로소 깊은 맛이 느껴지더군요. 원래 이북 음식이 간이 약하다고 하지만, 온갖 조미료에 물들기 전 우리 음식의 원형이 이랬겠구나 싶어요. ” 사흘 동안 저녁 3번, 아침 2번, 점심 2번을 들었다. “마지막 날 일정이 좀 바뀌어서 갑자기 저녁을 먹고 오게 됐어요. 그쪽도 갑작스러워선지 제일 평범하게 차렸더군요. 생선구이와 더덕장, 부루(상추)쌈 등이 나왔는데, 양념 치장 적게 하고 재료의 본 맛을 살린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

북한 음식 특징을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재료가 참 다양해요. 이번에도 ‘륙륙날개탕’이란 이름으로 나왔지만, 메추리, 꿩, 오리, 거위 등 다양한 새고기를 먹고, 염소, 양, 사슴고기도 많이 쓰더군요. 돼지고기를 소고기보다 훨씬 다양하게 여러 방법으로 조리하고요. ”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교시는 음식과 식생활 분야에서도 어김없이 발견된다. “료리를 만드는 데서 민족적 특성을 잘 살리는 것이 중요합니다”는 것이 그것으로, 연회 요리에서는 ‘민족 료리’를 서구화한 것이 많다. 생선과 고기, 새고기로 서양식 찬 요리인 갈라틴, 테린느 같은 음식을 많이 만들고 있으며, 모양내기나 양념은 중국 스타일도 강하다. “재료와 조리법으로 음식 이름을 붙이는 것도 중국이나 서구 영향으로 보입니다. ”

거리감 느낀 것 중 하나는 재료명. “젤라틴을 넣은 것은 다 ‘묵’이라하고, 당근은 홍당 무우, 홍당무는 빨간 무우라고 부르더군요. 양파는 둥글파로, 마요네즈는 닭알 기름즙으로, 증편은 쉬움떡으로 이름이 달라요. 낙지를 오징어라고 하고 오징어를 낙지라고 하는 것도 재미있었고요. ” 재료 계량 단위는 모두 g으로 쓴다. 후추가루 0.5g, 이런 식이다.

“북한 음식은 우리 음식 원형을 찾는 데 귀중한 원천이 될 겁니다. 김치를 그릇에 담을 때는 반드시 세워서 담는다든지, 이것 저것 이상한 양념을 마구 넣지 않는다든지, 조리법을 아주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적는 법이라든지 우리가 참고로 할 부분이 많습니다. ” 야생조류를 많이 쓰는 것이나 ‘발족 장과’처럼 궁중 요리에 말로만 전해오는 음식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도 반가웠다. 서양식 넓은 접시를 쓰는 등 차림새가 상당히 현대화된 것도 인상적이었다. “궁중 음식 만찬은 현지 요리사들도 좋다고 하더군요. 이희호 여사가 마지막까지 신선로 재료며 육수 맛 등 구체적인 조언을 해주신 게 도움이 됐습니다. ”

조리는 롯데, 워커힐, 신라 호텔 한식 조리사들과 한씨가 운영하는 국립극장 지화자 식당 조리사로 이뤄진 ‘드림팀’이 해냈다. 지화자(02-2269-5834)에서는 이번 만찬 메뉴를 특별 메뉴로 내놓을 예정이다.

/박선이기자 sunnyp@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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