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경찰(주역), 나쁜 경찰(조역) 이론이 있습니다. 자백을 받아내려면 한 경찰은 악역을 맡고, 또다른 경찰은 선한 역을 맡아야 효과적이라는 얘긴데…, 협상도 마찬가지죠. 이제 북한을 다루는 한·미간의 역할이 바뀌는 것 같군요. ”

최근의 한반도 상황을 지켜보는 미국의 속마음을 한 국무부 관리는 이렇게 표현했다.

미국은 남북정상회담 결과에 박수를 쳤다. 그것도 짤막하게 치고 만 것이 아니라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 대변인은 물론 클린턴 대통령까지 나서 2~3일간 ‘기립박수’를 치다시피했다.

북한의 문을 여는 것이 한·미간의 공통된 목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식 브리핑 무대에서 내려서면, ‘이제 조역이구나’하는 자각에서 비롯되는 복잡한 감정이 표출되는 것 같다. ‘우리 팀’이 임무를 잘 수행해서 좋긴 한데, 한 구석에서는 서운한 건지, 불안한 건지 미묘한 감정이 밀려드는 상황이라고 할까.

사실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 해결이란 과제는 김대중(김대중) 대통령이 이번 정상회담에서 충분히 언급했다고는 하지만, 미국이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 북한은 핵과 미사일 포기에 대한 ‘반대급부’를 원하는데 미국으로서는 곰곰이 따져봐도 별로 줄 게 없다. 의회가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 제재 완화도 실은 작년 9월 약속했던 것을 9개월이나 늦게 이행하는 데 불과하다. 밀 5만t 지원을 발표했지만, 북한의 성에 차지 않는 양이다. 이미 남한으로부터 큰 선물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북한이다.

이번 정상회담이 미·북관계에 주는 파급효과만 계산하더라도 할 일이 적지 않은 터에, 미국의 입장에서 정작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동북아 전략이란 큰 틀에 대한 재검토가 불가피하게 됐기 때문이다.

각 언론에서 주한미군의 미래를 주제로 한 기사가 나오더니, 제시 헬름스 미 상원 외교위원장은 “주한미군을 철수할지 여부를 검토할 때가 됐다”고 공개 발언하고 나섰다. 중국 문제 권위자인 해리 하딩 조지 워싱턴대 교수는 일본에서 기자들과 만나 “한반도 평화체제가 구축될 경우 미국, 일본, 중국은 큰 골칫거리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구 반바퀴를 돌고 며칠 전 워싱턴에 도착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20일부터 다시 중국과 한국 방문길에 오른다. 17일 국무부 브리핑 룸에서 기자들이 “7월 중순 방문 예정이었는데, 이번 남북 정상회담 때문에 앞당긴 것 아니냐”고 캐묻자, 리처드 바우처 대변인은 “미·중 간에는 논의할 현안이 많다”고 얼버무렸지만 남북간 정상회담으로 급박하게 돌아갈 동북아 정세로 발등에 불이 떨어졌음을 숨기지는 못했다.

특히 미국 보수층에서는 통일 한국의 위상이 미국의 동북아 전략에 타격을 가져올 가능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보수지인 월스트리트 저널은 16일자 사설을 통해 “북한이 자체 개혁을 하려는 의도를 나타내는 확실한 징후가 나타날 때까지 한반도의 평화는 정착되지 못할 것”이라며 “한·미간의 방위조약은 계속 유지돼야 한다”고 주장, 최근의 주한미군 논란에 쐐기를 박고 나섰다. 뉴욕타임스와 이코노미스트지도 남북정상회담이 북한 미사일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미 정부에 신중한 대응을 촉구했다. 이 같은 목소리의 바닥에는 통일 한국이 중국에 더 가까워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깔려 있다.

국무부는 20일 ‘대한 외교 특별위원회’를 소집한다. 제임스 레이니 에모리대 총장과 웬디 셔먼 대북정책자문관 등 민·관의 한반도 전문가들이 모여 한반도 정책을 긴급 점검하기 위해서다.

국무부의 한 관리는 “한·미·일 3국 공조를 더욱 긴밀히 하는 가운데, 북한과는 다단계 협상을 통해 핵과 미사일 문제를 해소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현재의 기조”라고 말했다. 오는 11월 대선에서 행정부가 바뀌게 될 미국으로서는 과도기에 큰 짐을 떠안은 모습이다.

/워싱턴=주용중기자 midway@chosun.com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