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주의의 갈등으로 이력서에 출신지를 기입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지만 예술가에게 고향을 지워버리면 작품을 이해하는 통로가 막혀버린다. 문학은 더욱 그렇다. 윌리엄 포크너와 제임스 조이스, 카뮤와 마르케스, 예이츠와 톨스토이 등 외국 문학가는 물론 서울 출신 염상섭, 전라도 채만식, 경상도 김동리, 충청도 정지용, 강원도 김유정, 평안도 김소월, 함경도 이용악의 문학세계를 이해하려면 그들의 혼과 뼈를 키워온 고향부터 접근하지 않으면 안된다.

소설가 김주영의 고향은 경북의 오지 청송군이다. 전쟁 전후 궁핍한 50년대, 작가는 진보면 장터에서 장사꾼들의 희노애락을 보고 들으며 성장기를 겪었다. 조선조말 장돌뱅이들의 애환을 민중적 시각으로 재현한 ‘객주’가 그런 연유로 태어났고, 이제 육순의 고비에 올랐어도 그 세계에서 떠날 줄 모른다. 성장기의 장터거리를 떠도는 작가의 끈질긴 집념이야말로 고향 풍정에 뿌리를 내린 혼을 보는 듯 하다.

신작 ‘아라리난장’은 오늘의 서민시장 유통구조를 통해 장사꾼들의 거친 세계를 펼쳐 보인다. 국제구제금융 한파로 실직과 이혼이란 이중고를 겪다 장판에 뛰어든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출신성분 다른 동업자들, 동가식서가숙으로 동분서주하는 사내들에게 붙박이 정을 심는 여성들이 엮어내는 활기찬 드라마는, 지금 서민들 삶의 실체이다.

소설 속에 “난 백수건달이었어. 가진 것이라곤 쥐뿔도 없었어. 재산이고 학력이고 가문이고 할 것 없이 모조리 털어내봐야 자랑할 것이라곤 불알 밑에 낀 때와 작업복 털면 떨어지는 먼지밖에 더 있었겠어”하는 장돌뱅이의 세계를 풍자와 해학을 섞어, 오늘의 시정 밑바닥 삶을 작가는 샅샅이 뒤진다.

먹거리가 어떤 경로를 거쳐 우리 식탁에 오르고, 자기 여자를 어떻게 보듬고 챙겨야 하며,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떤 궁리를 짜내야 하느냐가 소설 전편에 장타령처럼 이어지기에, 책을 들면 박은 코를 떼기가 쉽지 않다. 독자의 삶이 작중 인물로 들어가 가슴 서늘하게 활약하는 환상에 매료되기 때문이다.

작가 특유의 입담에 끌려 장사꾼들의 의리와 모사, 협동과 배반, 사랑과 투기를 쫓다보면 “목포의 땅콩과 토에낙지 연포와 홍어찜, 돌산갓의 여수는 노래미탕과 행송오리고기, 사과와 약대추와 포도의 고장 곡성은 은어구이와 참게요리와 인동초, 산유수와 우리밀과 오이의 구례는 산채정식과 섬진강 매운탕…” 판소리처럼 숨돌릴 틈 없이 이어지는 각 지방의 맛깔스런 음식과 조리법이 섞여든다. 작가가 전국을 누비며 발로 뛰어 취재했기에 독자는 활자로 군침을 삼킬 수밖에 없다.

소설은 주문진 어판장을 시작으로 경상도 내륙을 누비고, 충청도 안면도, 하동에서 구례를 거쳐 고흥과 영암, 중국과 러시아 연해주까지 장사의 손길을 뻗친다. 독자가 걸신들린듯 그들에게 편승하여 역마살로 뛰다보면 문득 아쉬운 미련이 남는다.

남북 화해의 물결이 거세게 일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개인 시장이 선다는 북한 땅 장거리 구경도 아울러 듣고 싶다는 욕심이다. 분단의 한인가, 그 부분도 반드시 김주영이란 작가의 손을 거쳐야 농익은 실체가 닿을 것이다. /김원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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