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일(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번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을 서방세계에 공개했다. 보름 전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했던 김 위원장이 왜 양지(양지)로 나온 것일까. 55년간 적대시(적대시)했던 남한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그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변화의 몸짓”이라고 우리측 회담 관계자들은 말한다. 평양에서 생중계되는 김 위원장의 말과 행동을 지켜본 서울에서도 ‘파격적인 변화’가 느껴진 게 사실이다. 한 당국자는 “그것이 연출이었다고 해도, 왜 그런 연출을 했겠는가”고 반문했다. 또 다른 당국자는 “북한을 보는 시각 자체를 바꿔야 할지 모른다”고도 했다.

북한의 변화는 사실 2~3년 전부터 조금씩 감지됐으며, 이번에 눈으로 확인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1998년 시장경제 수업을 위해 호주·중국 등에 경제관료들을 파견했다. 세계은행 등에 북한경제 진단을 의뢰하기도 했으며, 아시아개발은행(ADB) 등 국제기구 가입 노력도 시작했다. 올해 들어 이탈리아·호주와 수교했고, 필리핀·캐나다 등과도 수교 교섭을 벌이는 등 외교적 영역도 점차 넓히고 있다. 이번 남북정상회담도 하나의 ‘돌발 사건’이 아니라 일련의 ‘흐름’ 속에서 나온 것이다.

변화의 이유는 ‘살기 위한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통일부 관계자는 “변화 외에 살 길이 없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100년만의 대홍수 등으로 북한경제는 최악의 상태였다. 어느 나라도 긴급 구호 이상의 경제지원을 하지 않았다. 형제국가 중국도 서방지원으로 모자란 것을 보충하는 정도의 지원이었다. 서방으로 달려가 보았으나 대답은 ‘남한에 가라’는 것이었다.

북한에 남한은 체제경쟁의 대상일 뿐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는 위협의 대상이었다. 김정일이 “우리는 종심(종심)이 짧아 중국식 개방은 맞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결국 남한으로의 흡수통일을 의식한 것이라고 한다. 독일 통일이 김정일에겐 반면교사(반면교사)였을 것이라고 한다. 많은 전문가들은 “남한만 없어도 북한은 벌써 개혁·개방을 끝냈을 것”이라고 했다.

1998년 2월 출범한 김대중(김대중) 정부가 ‘흡수통일 반대’를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실제로 ‘북한 살리기’ 쪽에 초점이 맞춰진 대북정책을 펼친 것도 변화를 결심하게 된 요인이라는 게 우리 정부의 분석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과거 정치지도자들은 이렇게 못한다. 김 대통령과 내가 하면 무엇이든지 한다”고 말했다.

여기에 국제환경도 과거와 달라졌다. 미국이 더이상 북한을 ‘고립·압살’하진 않을 것이란 확신도 얻었다. 일본과의 수교협상은 체제안정과 경제회생에 도움이 된다. 중국과의 관계를 예전처럼 복원, 군사적·경제적 후원(후원)을 보장받았다. 푸틴 대통령의 방북을 계기로 러시아와도 관계 정상화를 시도한다.

조명철(조명철)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전 김일성대 교수)은 “김정일은 과거 사회주의 시장이 흔들릴 때마다 변화를 추구해왔다”면서, 1970년대 중반의 서방자본 유치, 83년의 합영법, 91년의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 등을 예로 들었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사회주의 조선’을 부강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지, 체제까지 바꾸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서방에서 생각하는 변화와는 물론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김인구기자 gink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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