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초청 받았던 佛요리사 '아시아 타임스' 기고

에르마노 플라니스(Ermano Furlanis)씨는 이탈리아 동북부 코드로이포시(市) 부근에서 부업으로 피자 요리사를 하는 금융전문가로 97년 북한에 가 약 20일간 피자요리법을 가르쳤다. 그는 최근 당시의 체험을 온라인 ‘아시아 타임스’에 기고했다. 다음은 요약이다. / 편집자


97년 7월 어느날 밤, 나는 한 저명한 요리사 동료로부터 ‘먼 나라’로 가서 함께 요리 연수를 해주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어느 나라의 외교관이 피자요리 시범을 자기 나라에서 보여줄 것을 요청해왔다는 것이다. 그 곳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어 값이 싸고 조리법도 간단한 피자에 대해 배우기를 원한다는 설명을 덧붙이길래 『굶주림에 시달리다 못해 이탈리아식 조리법까지 배우려나 보다』고 생각했다. 뜻밖에 그 곳은 북한이었다. 어떤 노인으로부터 까다롭기 짝이 없는 면접을 받고 선발됐는데 기쁨보다 두려움이 밀려왔다.

북한에 도착하자마자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이 연상됐다. 공항에서부터 우리의 수호천사 노릇을 해 줄 안내원 엄 선생이 나타났다. 엄 선생이 우리를 안내한 곳은 대리석 바닥이 깔린 화려한 건물로 적막감이 돌았지만 도서관과 대형 목욕실, 수많은 복도까지 마련된 훌륭한 방이었다. 공항에 도착해서 여권을 압수해 가더니, 이제야 비로소 일류 감옥에 갇혀버린 자신을 발견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유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가르칠 학생은 세 명이었다. 모두 특권을 누리는 장교들이었는데, 학생들은 나를 보자마자 피자 기술을 전수받기에 열중했다. 그 중 박 선생은 우리를 이탈리아에서 데려온 사람이다. 학생들은 아주 사소한 내용까지도 필기를 하더니 금세 피자를 꽤 잘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박 선생에게는 요리에 관한 한 무엇이든 임의대로 처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는지, 내게 필요한 양념과 재료들을 적어보라고 하고는 곧 수천달러 상당을 주문했다. 모든 것이 며칠만에 세계 곳곳에서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스무 가지도 넘는 프랑스산 치즈와 고급 포도주가 담긴 대형상자가 배달된 때도 있었다. 이탈리아 포도주도 훌륭하다고 했더니 사흘 만에 배달됐다.

안내원 엄 선생이 하루는 해변으로 나갈 채비를 하라고 했다. 응접실과 주방이 딸린 요트가 우리를 데리러 왔다. "플로리다 마이애미의 카프리"라는 이름의 배였다. 배를 타고 크고 작은 군도를 지나니 물위에 떠있는 듯한 놀이공원이 나타났다. 큰 배 옆에 묶여있는 작은 배에는 놀랍게도 피자 가게를 그대로 옮겨온 듯한 온갖 조리기구와 양념이 실려 있었다.

부엌의 직원들이 무언가로 흥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는데, 배 안에서 호화 객실이 있는 저쪽을 보니 벽화에서나 보던 북한 지도자 김정일이 서 있는 것이었다. 유명한 그의 머리 모양 때문에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그날 나와 박 선생은 일을 해야 했다. 피자가 아니라 양고기에 문제가 있었다. 양고기는 이틀간 절여둔 것이었는데 요리장식을 위해서 만도 엄청난 노동력이 들어간 대단히 정교한 음식이었다. 누군가가 이 양고기 요리가 너무 짜다고 평했다는 것이다. 그 한 사람 때문에 우리는 새벽까지 잠도 자지 못한 채 전체 식단을 고쳐야 했다. 짠맛이 나는 것은 모두 식단에서 빼냈다. 욕을 해대며 방으로 돌아가서 짐을 싸서 떠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누가 도대체 우리같은 전문 요리사들의 음식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 일행은 나중에 고급 방갈로로 옮겨갔다. 통제된 그곳은 손님보다 하인이 훨씬 많았고, CNN은 물론 전 세계 텔레비전을 볼 수 있었다. 잔인하게도 마침 그때 CNN은 북한의 심각한 기아상태를 연속 보도하고 있었다. 방송에 나오는 충격적인 굶주림의 현장을 북한에서 나는 한번도 목격하지 못했다. 엄 선생에게 계속 추궁을 하자 그는 북한에 식량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 휴양지에 있는 높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것보다 인민들을 위해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세계 어디나 결국 인간은 똑같다"고만 대답했다./정리=김미영기자 miyo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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