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반대쪽 구석에 있다는 작은 나라. 포성은 멎었어도 포연은 아직 매캐하게 남아있을 또 다른 분단국. 1956년 동독의 건축가 에리히 레셀(Erich Ressel)은 동독 공산당의 요청으로 ‘북한건설단’에 배속되었다.

함흥을 중심으로 도시계획, 건축작업을 하던 그는 틈틈이 이 신기한 세상을 사진상자에 담기 시작했다. 일년 남짓의 체류기간은 그에게 3500여장의 사진으로 남았다.

귀국 후 서독 망명길에도 이 사진보따리는 레셀의 품안에 들어있었다. 그도 세상을 떠났다. 25년간 먼지더미에 묻혀있던 사진들이 그 먼 길을 다시 돌아 그가 보았던 곳과 같고도 다른 세상에서 비로소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소개되었다. ‘동독 도편수 레셀의 북한 추억’(효형출판).

선별되어 수록된 250여장의 사진에 담긴 것은 함흥, 흥남, 원산, 평양, 신포 등에 새겨진 1957년의 모습이다. 레셀이 렌즈 너머로 바라다 본 피사체는 화장하고 때때옷 차려입은 배우가 아니었다. 그의 사진에는 헐벗은 산, 무너진 도시, 무심히 거리를 오가는 민초들, 낯선 이국인을 돌아보는 호기심 어린 눈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흘러간 시간, 가까이 갈 수 없는 공간의 기록은 우리를 그 사진만큼이나 뿌연 상념에 젖게 한다. 성천강에서 고추를 내놓고 미역을 감던 꼬마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이 되어 있을까. 개성의 시장터에서 보따리를 편 아주머니는 보름만 있다 따라 내려가겠다던 애절한 사연의 이산가족은 아니었을까. 검은 탕건에 담뱃대를 움켜쥐고서 쓰러져 가는 사당을 지키던 할아버지가 본 세상의 모습은 또 어떤 것이었을까.

오늘날 북한의 모습은 이제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쟁 직후의 모습은 아직도 우리의 자료집에서는 텅 비어있다. 이 책은 그 부분을 메워줄 중요한 사료가 될 것이다. 개마고원의 너와집들, 개성의 공민왕릉, 평양의 사회주의식 아파트, 그리고 그 사이 여기 저기 등장하는 한복, 군복, 인민복 차림의 아저씨, 아주머니들.

‘Architekt’라는 독일어가 ‘건축설계사’라는 이상한 단어로 옮겨진 점이 건축가의 눈에는 아쉽다. 그러나 책이 지닌 가치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이 책에 담기지 않은 나머지 사진들도 결국은 우리가 현대사의 서고 안에 갖춰 넣어야 할 우리의 기록들이다.

이 사진첩의 한 구석에는 “눈보라가 휘날리던 바람찬 흥남부두”에서 헤어진 금순이의 얼굴이 묻어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노동절의 기념행렬에서 작은북을 두드리는 어린이들도 남한 땅 어디서나 볼 수 있던 낯익은 우리의 얼굴이었음은 또 다시 새삼스럽다. 통일의 쟁기를 짊어질 세대에게 그 같음을 확인시키는데서 이 사진첩의 진정한 가치는 드러날 것이다. 사진 속의 주인공들, 혹은 그들의 아들, 딸과 함께 앉아 사진 속 거리를 짚어가며 이야기할 날은 언제쯤 올까. 반드시 올 그날까지 “굳세어라 금순아”. /서 현·건축가·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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