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서나 북에서나 뜨겁게 달아 오른 사람들의 감정이 마치 평양 인도를 메운 군중이 흔들어댄 가화(가화)의 깃발처럼 펄럭이던 한 주일이었다. 도취와 흥분의 시간이요, 민족의 감성(감성)이 하나 된 듯한 시간이었다. 남북이 금세 부둥켜안고 통일되는 날도 가시거리 안으로 들어온 것만 같은 분위기이다. 그러나 지난 반세기 동안 얼어붙은 분단의 빙벽은 그처럼 뜨거운 민족의 감성만으로 녹여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우선 분단의 현실이 ‘국토’ 분단이란 말이 잘못 암시하는 평면적 1차원적인 현실은 아닌 것이다. 국토만이 아니라 사람, 곧 민족이 갈라졌고, 이념이 갈라졌으며, 정치권력이 또한 갈라진 것이다. 분단은 다층적, 다차원적 구조를 갖는다. 그렇다면 통일도 1차원적이 아니라 다차원적인 분단구조의 극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물론 ‘순진’했던 1950년대엔 국토의 분단만 극복(‘실지 회복’ 또는 ‘남반부 해방’)하면 나머지 문제들은 동시에 그리고 일거에 해결될 줄 알았다. 그 방안은 ‘무력통일’이고 곧 전쟁이었다.

그러나 6·25전쟁은 3년여의 동족상잔 끝에 무력통일 대신 분단의 경계선만 더욱 무력(무력)으로 굳혀놓고 말았다. 무력통일은 실패했고 그 뒤를 당연한 것처럼 대체한 것이 ‘평화통일 방안’이다.

평화통일.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요, 민족의 감성에 어필하는 훌륭한 이상이다. 그러나 냉정한 이성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말의 화려한 모순이요, 하나의 위대한 환상이다. ‘평화’는 현상의 승인 위에서 가능하고 ‘통일’은 현상의 부인을 통해서 가능하다. 분단의 현상을 승인하면서 동시에 부인하는 ‘평화통일’이 과연 쉽게 가능할까? 하물며 갈라진 정치권력이 협상을 통해서 평화적으로 통일될 수 있는 것일까?

권력은 불가분(불가분)의 것이다. 적대자만이 아니라 동지들끼리도 마찬가지다. 올트 볼셰비키에 대한 스탈린의 피의 숙청, 남로당 간부에 대한 북한의 무자비한 숙청 등이 그 보기다. 뿐더러 권력은 ‘시간적’으로는 나눠갖기가 어렵다. 5·16 쿠데타를 같이한 박정희·김종필 처숙질(처숙질) 사이의 3선 개헌을 둘러싼 갈등, 또는 87년 대선에서 반독재·민주화 투쟁을 같이한 YS, DJ의 후보단일화 실패 등이 그 보기이다. 하물며 반세기 동안 굳혀진 남북의 갈라진 정치권력이 협상을 통해서 평화통일을 이룩한다…?

환상은 금물이다. 그러나 절망도 금물이다. 둘 다 비생산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생각을 돌리는 일이다. “전부가 아니면 전무(전무)” 대신에 가능한 것만이라도 실현해보자는 사고의 전환, 그것이 브란트의 동방정책의 출발이었다.

전쟁을 도발하지 않고는 (또는 도발을 해도) 독일의 국토분단은 극복될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분단만은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것은 가능할 수도 있다.

국경을 유지하면서도 비자만 있으면 생판 외국에도 가는데 같은 동족끼리 왜 왕래를 못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동서독 국경을 넘을 수도 있는 통행증 협상이 시작되었고 그러자니 통행증을 발급하는 동독 당국의 권위를 인정해 주게 되고, 급기야 “한 민족, 두 국가” 체제 속에서 국토는 분단되었어도 민족의 분단은 평화적으로 극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분단의 다층적 구조의 인식에서 출발했다면, DJ의 햇볕정책은 분단극복의 다단계적 발상에서 출발했다. 이번 평양의 남북정상회담과 공동선언은 그러한 DJ식 북방정책의 성취요 승리이다.

평양에서의 환대와 포옹으로 확인된 것은 두 권력의 엄연한 실재이지, 그 소멸이 아니다. 정상회담으로 보다 튼튼히 다져진 것은 ‘통일’보다도 ‘평화’의 큰 길이다. 그것이 역사적인 성과이다.

평화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그 대신 평화가 굳혀지면 언젠가는 그 위에서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통일에 대해서는 동맹국도 이해가 엇갈릴 수 있지만 평화를 위해선 전 세계가 우리와 동맹해 줄 것이다. 통일은 그 뒤의 일이다. 그것이 민족이성의 정언적(정언적) 명령이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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