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을 전후 우리는 북한의 문화예술 공연을 실컷 보았습니다.

평양학생소년예술단, 평양교예단, 만경대 학생소년궁전 학생공연단…. 남북의 창이나 뉴스 프로그램에서 단편적으로나 접했던 이들 공연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대단하다”는 놀라움이었을 듯합니다.

어떤 이는 “개량 국악기 독주는 케니 지를 뛰어 넘더라”, “딥 퍼플보다 나은 드럼연주”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그들의 기예(기예)는 세계적 수준이었습니다. 소년예술단원의 연주 재능은 신동(신동)에 가깝고, 교예단의 솜씨도 유럽의 초일류 애크러배틱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민속 전통을 이어받은 작품이 적지 않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억에서 희미해져 가고 있는 장터의 어름사니(외줄타기 광대), 농악의 상모놀이, 물동이춤, 키춤…. 태평소(새납)을 개량한 장새납, 가야금을 개량한 것 같은 악기 등 전통악기를 나름대로 변형, 현대화해서 활용하는 모습도 돋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 어딘가에 남는 ‘앙금’을 느끼신 분도 없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공연은 타악을 많이 사용하고, 음조의 강약 진폭이 크며 템포가 아주 빨랐습니다. 춤 동작도 회전이 급격하고 보다 각이 지는 등 우리와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 차이는 단순히 반세기 세월의 격차 탓만은 아닌 측면이 있습니다. 사회 운영 방식과 추구가치 등이 서로 다름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정상회담 후 ‘화합’과 ‘공존’을 화두(화두)로 삼고 얼싸 안아야 하는 양쪽에 아주 단단한 가시가 될지 모릅니다. 반면 ‘시너지의 역동성’를 지닌 공영(공영)의 강력한 엔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양과 음을 품은 태극이 생명의 원천이듯 서로 다른 남과 북의 만남은 세계가 놀라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이 가시를 뛰어넘는 ‘따로 또 같이’라는 미덕이 절실합니다.

부산도 예외는 아닙니다. 부산 중구청이 오는 23일 피란살이의 애환이 서린 40계단에서 갖는 ‘이산가족 만남의 장’ 행사도 이런 고민의 결과였다고 합니다. ‘화합’이라는 주제를 가미하기 위해 이 행사를 기획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부산항은 남북교역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부산이 넉넉한 개방성의 장점을 살린다면 남과 북의 종합을 이루는 주축중 하나가 될지도 모릅니다. 부산 문화가에 이것이 시사하는 바도 적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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