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죽리발관, 통일다리식당, 동흥책방, 천연색사진관, 양복조선옷, 구두수리, 닭곰집, 남대문수리소, 봉동식료품상점, 고려영예군인약공장….

지난 16일 개성관광 버스에서 내려다본 개성 시내는 마치 1960년대 우리나라 지방 소도시를 연상시켰다.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거리를 지나가는 북한 주민은 남측 관광버스를 애써 외면했다. 골목길에 숨어 밖을 내다보는 주민도 있었다. 4~5층짜리 낡은 아파트의 유리창에 달라붙은 아이들만 고사리 손을 흔들어 남측 관광객을 반겼다. 관광지를 제외한 거리와 북한 주민 촬영은 엄격히 금지됐다.

▲ 박연폭포.지난해 12월 5일 시작된 개성관광은 한 달 만에 1만명을 돌파할 정도로 꾸준히 관광객이 몰리고 있다. 당초 예상과 달리 실향민보다 수도권 40~50대가 관광객의 주를 이룬다. 20~30대의 비중도 20%에 육박한다. 한파가 몰아친 이날도 초등학교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 단위 관광객과 연인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개성관광이 당일 역사관광지로 자리 잡아가는 느낌이었다.

'송도 3절'의 하나인 박연폭포는 '선폭(仙瀑)'이라는 별칭답게 정갈하고 단아한 자태를 드러냈다. 폭포 앞 매점에서는 1달러를 내고 커피 한 잔을 사 마실 수 있었다.

폭포 북쪽 관음사는 고려 초기에 창건된 1000년 고찰이다. 예전에 동유럽, 중국, 러시아 등 공산권 손님이 주로 찾았다는 이 절의 시주함에는 이제 남쪽 손님들이 넣은 달러·원화 지폐가 수북했다. 20년째 절을 지키고 있다는 청맥스님은 "요즘 외부 손님이 많이 늘었다"고 했다.

▲ 양반촌‘민속려관’점심 식사를 위해 들른 개성 북부거리의 '민속려관'은 1900년대 초반 양반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작은 실개천 주변으로 100년이 넘은 기와집 한옥 20여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점심으로는 개성 전통의 11첩 반상(飯床)이 나왔다. 놋쇠를 망치로 두들겨 만든 방짜 유기에 담긴 고사리와 두릅, 도라지, 콩나물이 입맛을 돋웠다. "남쪽에서는 이런 자연산 맛 못 봐." 지방에서 왔다는 한 할머니는 연방 음식 맛에 감탄했다. 식당 책임자는 "11첩 반상에는 56가지 각종 음식 중에서 11가지를 골라 내는데, 주로 남쪽 사람 입맛에 맞는 것으로 고른다"며 물 오른 비즈니스 감각을 뽐냈다.

정몽주가 피살된 선죽교는 시내 가운데 있었다. 서울 출신의 한 70대 노인은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경의선을 타고 이곳에 온 적이 있는데, 60여 년 전 모습 그대로"라며 회상에 젖었다.

▲ 개성 전통의 11첩 반상. /최유식 기자개성관광의 주 수요층은 초·중·고 교사였다. 고려 500년 도읍으로 옛 고려궁터인 만월대, 선죽교, 왕건릉, 고려박물관 등 역사 유적·유물이 많고, 북한 주민의 생활 모습도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날은 대구 월촌초등학교 교사 35명이 단체 관광을 왔다. 김은경(27) 교사는 "전날 밤 11시30분 기차를 타고 올라왔다"며 "북한 주민의 삶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허름한 유리곽 안에 국보급 유물을 보관하는 허술한 유적·유물 관리, 북한 주민에 대한 지나친 통제 등 관광객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대목도 적잖았다. 김남철(74·서울)씨는 "남쪽 관광객이 찾는 지금도 이 정도로 문화재 관리가 허술한데 옛날에는 어땠겠느냐"며 혀를 찼다. 관광객 정기문씨는 "길거리를 지나가는 북한 주민이 버스를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게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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