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에서 체결된 5개항의 합의는 일반적으로 모호하기는 하지만 현단계에서 기대할 수 있는 선에서 긍정적이다. 이번 정상회담의 결과는 앞으로 오랜 기간 연구되고 세밀하게 분석될 것이다. 하지만 냉전의 마지막 남은 요새의 얼음이 비록 아직은 다소 미끄럽더라도,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은 명백하다. 동북 아시아가 지정학적 동상(동상)으로부터 더이상 고통받지 않고, 보다 친밀한 관계에서 비롯되는 열대의 따뜻함이 지속되기를 희망한다.

남북 정상회담은 훌륭한 시작이지만 앞으로 조심스러워야 한다. 남북한은 그동안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방아쇠에 손을 너무 많이 얹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복잡다단한 문제에 대해 데카르트적인 명백하고 분명한 결론을 바라는 사람들은 앞으로 사려가 깊어져야 하고 심지어는 의혹의 눈초리를 가져야할 것이다.

그러나 국제관계에서의 진전은 통상 점진적으로 달성되고, 이번의 경우에도 그렇다. 양 당사자가 모든 목적을 달성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나이브할 수 있지만, 앞으로 한반도에서 ‘윈·윈(win·win)’적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다.

김대중(김대중) 대통령은 단기적으로는 이번 회담에서 그의 햇볕정책의 정당성을 입증했다. 전쟁을 치렀고, 더구나 서로 완전히 다른 정치 경제 시스템을 갖고 있는 적국간의 분쟁도 해결될 수 있다는 점을 전세계에 보여 주었다. 한반도 긴장을 완화하고 미래의 협력을 모색하려는 김 대통령의 노력은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물론 앞으로 남북간 협상이 쉽다거나 상호간 공방이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남한의 대북 경제 지원과 투자가 증가함에 따라 남한 국민들은 대가를 지불하게 되겠지만, 이것은 한국 민족 전체의 이익으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남북간에 국방비 감축을 얘기하는 것은 너무 이르다. 햇볕정책은 북한에 대한 군사적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번 회담에 응한 것은 북한 내부에서 확고한 지위를 확보했다는 계산에 근거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가 외부세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군과 노동당을 확실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번 회담은 연장자인 김 대통령과 그를 동렬선상의 협상무대에 서게 함으로써 그의 정치적 정당성을 강화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다른 정보 채널을 갖지 못한 북한 주민들은 김 대통령이 평양에 갔다는 사실을 김정일의 개인적이고 국가적인 승리로 받아 들일 수 있다.

김정일은 또 남한과의 정상회담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죽은 김일성의 희망을 완수한 효심깊은 아들로 자신을 각인시킬 수 있다. 경제적으로 북한은 얻을 것이 더 많다. 남한은 지금까지의 대북 식량과 비료 지원, 현대의 금강산프로젝트 이상으로 더 많이 지원하게 될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은 일본을 향해 ‘지금이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할 시기’라는 점을 다시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일·북 관계가 정상화되면 북한은 원조든 배상이든 일본으로부터 상당한 경제적 지원을 얻을 수 있게 되고, 일본은 북한의 미사일 위협을 감축할 수 있게 된다. 98년 8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 이후 극도로 얼어붙었던 양국관계가 해빙될 수 있는 것이다.

김정일의 지난번 방중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각종 정황에 따르면 중국은 북한으로 하여금 중국의 국가 이익에도 합치되는 북한 정권의 지속성 확보를 위해 국내 경제정책을 개방하도록 압력을 가한 것 같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미·북 관계가 진전되면 평양의 위협을 명분으로 한 미국의 전역미사일 방위체제의 필요성을 감퇴시킬 수 있다. 중국은 미국의 미사일 방위체제에 대만까지 포함될 것을 염려하여 이를 강력히 반대해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다음달 평양방문의 목적은 북한의 미사일문제를 해소시키려는 데 있는 것 같다. 러시아 역시 미·러관계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미국의 국가 미사일 방위체제의 필요성을 감축시키려는 입장이다.

미국은 그동안 끊임없이 남북간의 직접 대화를 지지한다는 정책을 반복적으로 밝혀왔지만 남한이 북한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았다는 사실에 흔쾌해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김 대통령은 현재 미국 행정부가 공화당이 지배하는 의회와 한반도 이슈에 대한 제한된 정치적 자원 때문에 주저하는 곳으로 남북관계를 이끌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미국은 이제 한국이 그들 자신의 문제를 풀기 시작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할 처지에 이르렀는지 모른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앞으로 몇달 또는 몇년간 주요 이슈로 등장할 주한미군의 장래에 대해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에 대해 너무 많이, 너무 빨리 기대해서는 안된다. 현재의 도취감이 불행하게도 절망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망은 비교적 밝다. 동북아의 안녕과 번영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은 지난 며칠간 남북이 이룬 성과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다.

/조지타운대 아시아학과장

/정리=주용중 워싱턴특파원 midway@chosun.com

◈ 데이비드 스타인버그

▲미 국제개발처(USA ID) 아시아·중동문제 기술지원 과장 역임.

▲한국·홍콩·버마·워싱턴 DC의 아시아 재단 지부장 역임.

▲현재 미 조지타운대학 아시아학과장, 아시아 재단 선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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