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재
/편집부국장 hjkim@chosun.com

8·15 평양축전 기간 북한을 방문했던 남한측 방북단 일부 인사들이 보여준 언행은 한국 지식인 사회의 깊이를 새삼 생각케 한다. 그 ‘일부 인사들’ 가운데 우리가 지식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끼어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각이 사회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무슨 주의나 주장의 우열이나, 좌파냐 우파냐 하는 편가름을 떠난 인류보편의 가치, 즉 인권이나 평등에 대한 ‘일부 지식인들’의 고집스런 편견과 완고함, 그리고 눈가림이 도를 지나친 측면 때문이다.

‘좁은 문’의 작가 앙드레 지드.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지드는 공산주의자였다. 그가 공산주의에 빠져든 이유는 ‘너무도 인간적’이다. 20세기 초반 유럽 특히 조국 프랑스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어떤 행패를 부렸는지, 어떻게 그곳 사람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는지를 보고 난 다음이었다.

사실 지식인에게 ‘평등’이란 말보다 더 매혹적인 말도 없다. 자본주의 초기 단계에 있던 20세기 초반 유럽 지식인들이 이데올로기로서의 사회주의와 그 구현으로서 공산주의 혁명에 ‘평등사회 도래’에 대한 기대를 건 것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는 명작 ‘주르날’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마르크스 때문에 공산주의에 빠진 게 아니다. 나는 마르크스를 이해하려고 참고 견디면서 마르크스를 읽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나를 설득하지 못했다. 나로 하여금 진심으로 공산주의를 믿게 한 것은 나 자신이 향유하는 특권적 위치였다.』

귀족계급으로 태어나 모자랄 것 없이 자란 지성인으로서 누군가의 희생이 자신이 누리는 부의 원천이 되고 있다는 현실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공산주의 예찬은 이어진다. 『나는 왜 공산주의를 동경하는가. 그것은 공산주의가 평등하기 때문이며 또 나 자신이 특혜를 받고 있음으로 해서 더 강렬하게 느끼는 불공평 때문에 괴로움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드의 이런 생각은 그러나 단 한차례의 소련방문으로 산산이 깨지고 만다. 1936년 6월 소련공산당 작가동맹 초청으로 소련을 방문하고 돌아온 다음의 일이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지드의 소련에 대한 환멸은 「융숭한 대접」 때문이었다.

『가는 곳마다 나는 최고의 요리, 최고급 호텔에서 최상의 대접을 받았다. 그것은 무엇인가. 특권이 아닌가. 내가 소련에서 가장 실망한 것은 그 나라가 아직 완전무결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조국에서 그토록 싫어했던 모든 것을 소련에서 보았기 때문이었다. 소련 특권층의 부의 원천은 바로 대다수 국민의 절대빈곤이었다.』(공저, 실패한 신·God that Failed)

지드의 환멸은 프랑스의 지성을 직접 겨냥했다. 소련에서 일어난 계급혁명의 실상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고, 또 알려야만 했던 지식인들이 침묵하는 데에 분노했다. 『나는 (프랑스 공산당원 등) 소련의 실상을 뻔히 아는 사람들, 또는 알고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꾸준히 다른 나라 노동자들을 속여온 사람들을 힐난한다.』(소련기행)
그렇다면 프랑스 지성사에서 앙드레 지드는 「변절자」인가. 터무니 없다. 왜? 진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남북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수많은 ‘지식인들’이 북한을 다녀왔다. 그들은 방북할 때마다 북한 기예단 공연을 관람하고 담배꽁초 하나 없는 만경대를 둘러보았으며 최고급 만찬을 대접받은 다음 감격에 겨워 손에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소리 높여 부른다. 그야말로 ‘융숭한 대접’이다.

정말 궁금하다. 아직도 절대 기아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북한 주민들의 피와 땀이 없이 자신들이 받는 ‘융숭한 대접’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그렇게도 힘든 일일까. 한국에선 아직은 앙드레 지드와 같은 지성의 탄생을 기대하기 이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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