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이산가족 상봉을 앞두고 북한이 200명의 명단을 공개한 16일 전국 곳곳에서 혈육의 생존사실을 확인한 이산가족들이 지난날을 회고하며 재회의 부푼 꿈에 젖었다. 이날 대한적십자사와 통일부 및 언론사에는 이산가족들의 확인 전화가 밤늦게까지 몰려들었다. ○…경기도 하남시 이덕만(이덕만·여·87)씨는 맏아들 안순환(안순환·65)씨가 가족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은 이날 저녁, 자녀들을 껴안고 50년 참았던 눈물을 펑펑 쏟았다. 50년 가을 15살이었던 순환씨는 “북한으로 가면 학비 없이 공부할 수 있다더라”며 가방 하나 달랑 메고 집을
나는 분명한 것을 추구하지만 너무 분명한 주장에는 일단 의심을 갖는다. 묻고, 따지고, 근거를 찾는 철학을 직업으로 하고 있는 탓도 있겠지만 진리는 양극단보다는 중간쯤에 있다는 것이 삶을 통해 얻은 조그만 지혜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다양한 사상과 가치들을 조화롭게 엮어내는 화쟁(화쟁)과 상생(상생)의 집단적 무의식이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나는 급격한 사회변동을 겪으면서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지나치면 탈이 나게 마련이라는 인식을 더욱 더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매사에 뜨뜻미지근한 것보다는 ‘화끈
16일 통일부 홍양호 인도지원국장이 북한이 보내온 8·15 남북이산가족 상봉 대상자 명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덕훈기자 leedh@chosun.com
북한이 16일 통보해 온 이산가족 방문단 후보 명단에는 북한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학자,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많이 들어 있다. ◆학자대표적인 인사로는 원로 국어학자인 류렬(82), 김일성종합대학 수학박사인 조주경(68),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부 어학강좌 교수인 김영황(69), 경공업분원 방직연구소장인 조용관(78), 김책종합공업대학 강좌장인 하재경(65), 한덕수 평양경공업대학 강좌장인 김봉회(68)씨 등이다. 학자는 아니지만 경영학에 조예가 깊은 평양시 직물도매소 지배인 홍응표(64)씨도 포함돼 있다. ▲류렬=북한의 대표적
대한적십자사 직원들이 16일 북한적십자사에서 보내온 북측 8·15 남북이산가족 방문단 후보자 명단을 검토하고 있다. /김창종기자 cjkim@chosun.com
북한이 이산가족 방문단 후보 명단에는 북한이 주체섬유로 일컫는 ‘비날론’을 개발한 북한의 화학자 이승기(96.2 사망) 박사의 부인 황의분(84)씨도 포함돼 있다. 이 박사 일가는 북한에서 ‘과학자 집안’으로 ‘우대’받고 있는 집안. 그의 아들인 이종과 김일성종합대학 촉매과학실장은 지난해 3월 평양에서 열린 ‘전국 과학자. 기술자 대회’에서 “우리 일가 중에 35명의 박사, 학사, 연구사가 자라났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승기 박사는 전남 담양 출생으로 일본 유학 중이던 지난 39년 화학섬유의 일종인 비날론을 발명, 북한에서는 ‘비날
남북적십자사가 16일 이산가족 교환방문단 예비후보 200명의 명단을 상호교환함으로써 ‘8·15 이산(이산)상봉’이 본격화되고 있다. 남북적 양측은 오는 26일 상대 측으로부터 통보된 명단 가운데 각각 100명을 선정해 대상자를 최종 확정한다. 정부와 한적(한적)은 북에서 통보된 명단의 신원을 조속히 파악하기 위해 이날부터 주민전산자료, 이산가족 정보통합센터 등록자료 검색과 함께 경찰, 한적 등의 관계기관을 통한 생사여부 확인 등 조사에 나섰다. 당국은 이와 별도로 북한이 통보한 명단을 언론에 공개해 언론을 통한 신원확인 작업도 병행
★북한 이산가족 명단 범례※찾는 사람(성별·나이)/출생지/본적지/헤어질 당시 주소/헤어질 당시 직장·직위※=다음은 찾고자 하는 남쪽 사람으로 성명(성별·나이)/관계/헤어질 당시 주소/헤어질 당시 직장·직위순. 바로 앞의 사람과 주소가 같을 경우에는 ‘주소같음’이라고 표기했음. ◈찾는 사람 출생지 서울◆리기명(남·70)/서울 서대문구 관동 4-264/서대문구 영천동 4-264/동대문구 신당동/한양공대 건축과 학생=①이무욱(남·109)/부/서대문구 교북동 23/자유노동 ②정예분(여·98)/모/주소같음 ③이기영(남·80)/형/인천/인천시
나카소네(중증근강홍) 전 일본총리는 G8 서밋(주요 8개국 정상회담)을 ‘정치 올림픽’에 비유하곤 했다. 강대국 정치 지도자가 지력(지력)과 순발력과 설득능력을 겨루는 국익의 종합승부라는 뜻이다. 26번째 ‘정치올림픽’이 될 2000년 서밋이 세계 50억 관중의 시선을 집중시킨 채 오는 21일 일본 오키나와(충승)에서 막을 올린다. 2박3일간 열릴 오키나와 서밋의 ‘출전 선수’ 중엔 물론 8번째 출장하는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자타공인의 최강이다. ‘강한 러시아’를 외치며 첫 출전하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만만치 않은 전력으로 평가된
“김대중(김대중) 대통령의 당선과 남북 정상회담이 지난 3년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한국 방문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다음달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스티븐 브라운(54) 주한 영국대사. ‘카레이서 대사’로 더 잘 알려진 그는 지난 3년을 되돌아보며 “역사적이고 흥미로운 순간들이었다”고 말했다. 또 “남북한 모두에 중요한 시기가 왔고, 영국 대사로서 기여할 부분도 있을 텐데 지금 떠나게 돼서 섭섭하다”고 했다. 영국과 북한의 수교 가능성에 대해 “북한이 국제 사회로 나서기 시작했지만 좀 더 지켜봐야
남과 북이 6·15 공동선언을 계기로 종래의 냉전구조를 청산하고 진정한 공존공영(공존공영)의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55년 동안의 휴전상태 극복이 그리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당장 휴전선에 전진배치된 군사력은 아직도 가공할 만하다. 북한 핵과 미사일 개발 여부에 대한 투명성도 아직 확보돼 있지 않다. 어느 한쪽의 의지만 갖고 되는 일도 아닌 듯하다. 앞으로도 남북한 간에 크고 작은 충돌이나 갈등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김태일·김태일 영남대 교수). 그럼에도 양측이 일단 ‘서로 도와가며 잘 살아보자’는 공동선
김대중(김대중) 대통령은 14일 청와대를 방문한 고노 요헤이(하야양평) 일본 외무장관을 접견한 자리에서, “남북관계가 옛날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것은 우려할 만한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이날 “우리가 만난 사람들이나 금강산 관광객을 대하는 북한 사람, 최근 북한을 다녀온 사람들의 말을 종합하면, 북한 측은 나의 과거 민주화 투쟁과 대북정책 추진과정에서의 일관성을 평가하면서, 다음 정권이 대북정책을 일관되게 할 것인지 걱정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이 같이 말했다. 김 대통령은 이어 “우리(남한)는 많은 우여곡절을
“김정일(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정치 군사 등 일체의 사업 중에서 경제가 최우선이라고 강조했다. ”6월 28일부터 30일까지 정주영(정주영) 전 현대 명예회장과 함께 방북했던 현대아산 고위관계자는 “북한이 변하고 있음을 절감했다”고 말했다. 김 국방위원장이 정 전 명예회장을 4시간30분이나 만난 것이 대표적 예라는 것. 1998·1999년의 환담은 각각 2시간 남짓이었다. 정상회담 이후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북한 관영매체의 보도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지난 한 달 동안 북한 신문과 방송은 남한 당국에 대한 원색적 비방을 없앴다. ‘
“연방제 방식으로 통일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구체적 실정에 맞는 조국통일 방도의 대원칙이다”(7월 7일 평양방송), “자주(자주)는 조국통일의 근본 원칙이다”(7월 4일 평양방송). 북한 보도매체들은 정상회담 이후에도 연방제와 자주(주한미군 철수 의미)를 주장하고 있다. 공동선언에 명시된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어디서도 볼 수 없었다. 남한 사회의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키거나 북한에 유리한 사건들만 ‘선별’ 보도하는 관행도 여전하다. ‘매향리 주민들의 격렬한 반미투쟁 전개’(6·19 평양방송), ‘민주노동당 보안법 철폐촉구’(6·18
14일 국회에서 한나라당으로부터 부정선거 혐의를 지적받은 민주당 정대철(정대철) 의원이 한나라당 이회창(이회창) 총재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이 때문에 본회의가 정회 사태까지 갔다. 5선(선)인 정 의원은 신상발언을 통해 “이 총재는 나의 고교(경기고)·대학(서울법대) 선배이지만 정치는 내가 먼저 했다”면서 “이게 상생(상생)의 정치냐, 상살(상살)의 정치지”라고 비난했다. 정 의원은 그런 끝에 “정치 선배로서 충고한다”면서 비어있는 이 총재 의석 쪽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이회창 대표, 정신차리쇼. 정치 이렇게 하면 안돼”라고
6·15 공동선언 후 남한사회도 남북한 문제에 관해 ‘혁명적 변화’를 겪고 있다. 우선 정부당국이 어렵게 트인 민족화해의 물꼬를 유지하기 위해 잇따른 남북화해 조치를 내놓고 있다.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배려’도 눈에 띈다. 정부는 6·25 50주년을 맞아 대대적으로 벌이려던 행사를 대폭 축소했고, 을지포커스렌즈 훈련(8월)도 실전 훈련을 취소했다. 휴전선의 대북(대북) 심리전 방송을 즉각 중단한 것은 그 시작일 뿐이다. 과거 정부가 금기시했던 국가보안법 개정도 대세로 굳어지는 양상이다. 개정폭도 불고지죄·찬양고무죄 수준에서
북한의 변화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본다. 북한은 남북정상회담에서 비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 노동신문·민주조선에서 남한을 헐뜯지 않고, NLL(해상 북방한계선)을 넘어간 우리 어선도 돌려줬다. 이산가족 만남을 위한 적십자 회담에도 응했다. 남북정상회담 자체는 대성공이다. 지금은 실천의 단계이므로 당국자회담이 열려서 4개 분야 공동위원회가 구성되는지, 긴장완화·평화구축을 위한 후속조치가 이뤄지는지를 봐야 한다. 따라서 지금부터 8월 하순까지가 매우 중요한 단계다. 당국자회담을 기다려 봐야 한다. 그 중 군사공동위원회가 구성된다면 성공이
북한의 대남(대남)자세는 전술적 변화를 보일 뿐, 전략적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휴전선 대남방송 중지, 노동신문의 남조선란 삭제, 8·15 이산가족 방문단 합의 등은 전술적 변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남한 내의 소위 ‘지하당’이라 주장하는 ‘한국민족민주전선’의 활동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대남혁명전략이 변하지 않고 있음을 극명히 보여주는 사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전방부대에서 (공산주의) 혁명과 사상의 강자(강자)가 될 것을 주장하고, 북한 관영매체들이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언급하지 않으면서 고려연방제 통일방안만 주장
1953년 7월 어느날, 싸리재 초입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밤나무골 입구 ‘김응석병원’ 앞쪽 공터에도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니 기차 한 대가 기적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나타났다. 거기에는 북한으로 송환되는 포로들이 가득 타고 있었다. 그들은 군가를 목 터져라 불러대고 있었다. 기차가 철교 위에 이르자 포로들은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송환 선물로 지급 받은 치약, 칫솔, 수첩 등과 심지어는 신고 다녀야 할 군화까지 마구 차창 밖으로 내던졌다. 군중들은 이 광경을 냉연히
6·15 남북공동선언의 가장 큰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통일을 20~30년 뒤에 맞기 위한 평화공존, 남북 공동번영의 남북 당국합의가 이뤄진 것이다. 이 선언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분단 55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한 정상이 각기 자기 국호를 명시하고 직접 서명했다는 점이다. 동서독 통일의 교훈은 졸속의 일면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지난해로 독일 통일 10년을 넘기며 서독은 동독지역에 10년간 매년 국민총생산의 3%를 집어넣었으나 ‘밑빠진 독에 물 붓기’라 해서 작년부터 일방적 지원을 감축했다. 서독 국민들은 통일에 앞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