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처음 와서 이해하기 어려웠던 단어가 ‘날치기 통과”(pass a bill forcefully)였습니다. ‘날치기’라는 말을 국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남의 물건을 날쌔게 가로채는 짓, 또는 그런 도둑”(steal, snatch)이라고 설명돼 있습니다. 북한의 「조선말대사전」도 날치기를 같은 뜻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에서 ‘날치기’는 다른 뜻도 갖고 있습니다. 클레이 사격(clay shooting, skeet shooting)을 날치기라고 합니다. 북한에서는 ‘날치기 통과’란 상상도 할 수 없겠지요? 북한에서 날치
아직도 미완으로 남은 그들의 꿈과 생애80년대 대학 시절 한국문학사 수업시간에 만난 일제시대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관련 문건들에서는 어김없이 삭제된 글자나 문장이 등장했다. 임X, 이X영, XXXX 혁명, XX투쟁. 사라진 글자는 하나의 미로였고, 이를 추측한다는 것은 복잡한 퍼즐게임을 푸는 과정과도 같았다. 삭제된 문자 투성이의 구문서들은 이들 존재의 운명에 대한 내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을 학문적인 용도로 언급한다는 것조차 금지되었던 시기였다. 일제시대 계급과 민족 문제로 이념과 열정을 불태우다 월북했던 지
‘말 공부’를 한다? 어린애가 말을 배운다든가 학생이 외국어 공부를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북한에서 ‘말 공부’는 ‘부질 없는 말’ 과 같은 뜻입니다. 북한 조선말대사전에서는 “(어떤 문제의 해결이나 실천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부질 없는 빈말을 일삼는 것 또는 그런 말” 이라고 설명합니다. 영어로 옮기면 “to study language”가 아니라 “empty words or actions, meaningless activities” 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조선말대사전에는 ‘말 공부질’ ‘말 공부쟁이’ 등의 단어도 실려 있습니
“아버지가 힘이 있을 때 다른 집처럼 재산도 좀 모으고 우리를 ‘먹을 알 있는’ 직업에 밀어 넣어 주셨더라면...”한 탈북자가 북의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쓴 글의 한 구절입니다. 먹을 알 있다? 얼핏 듣기에는 “There is an egg to eat” 처럼 들릴 것 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북한에서 흔히 쓰이는 이 말은 ‘실속 있는’(worthwhile or substantial)이라는 뜻입니다. ‘먹을 알’은 북한의 조선말대사전(1992)에도 올라 있는데 “얻어서 가질만한 실속이나 소득으로 될만한 거리”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넘나드는 병상에서 월북작가 박태원은 완전실명과 전신마비의 몸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구술 집필을 하고 있었다. 받아쓰는 사람은 그의 아내 권영희. 마지막에는 그의 말문조차 막혀버렸다. 아내가 대신 써서 읽어주는 글을 그는 필사의 몸짓으로 감수(감수)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작품이 대하 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 3부작이다.◇사진설명: 손녀의 도움으로 독서하는 모습. 북한 화보 '조선' 80년 12월호에 소개됐다.처절한 사투였다. 그래도 그는 행복했을 것이다. 월북 작가로서 죽음의 순간까지 작품을 쓸 수 있는 ‘행운’을 누린 사
북한에도 수표(check)가 있을까요? 정확히는 모르지만 일반인들 사이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북한에도 수표라는 말은 자주 쓰입니다. 물론 뜻이 다르지요.북한 조선말대사전(1992)에서 ‘수표’라는 말은 “증명이나 확인을 위하여 도장 같은 것을 찍는 대신에 자기 손으로 자기의 이름을 나타내는 일정한 표식(標識; 표지)을 하는 것, 또는 그 표식” 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사인 또는 서명(‘sign’ ‘signature’) 이라고 하지요.“등기 소포를 받기 위해 수표했다”(I signed in orde
‘은을 내다’‘worthwhile effort’북한 신문이나 잡지를 보면 ‘은을 내다’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일상 생활에서는 잘 안 쓰이지만, 글에서는 흔한 표현입니다. 북한 조선말대사전을 찾아보면 이 말은 “어떤 일이나 행동이 보람 있는 값을 나타내다”, (reap the benefits from a certain action or task)라고 설명돼 있습니다. ‘은’이라는 단어는 “보람 있는 값이나 결과”라고 돼 있습니다. ‘성과’ 또는 ‘효과’(worthwhile effort)와 깉은 뜻이겠지요. ‘은을 내다
정치가로 교육가로'화려한 삶'1948년 9월 9일 북한 첫 내각이 출범한다. 그 때의 빛바랜 사진속에는 가운데에 수상 김일성, 그 옆에 부수상 박헌영이 자리하고 있다. 그 뒷편에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로서 교육상이 된 백남운의 모습이, 사진이 낡아서인지 더욱 흐릿하게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원시고대 사회를 처음으로 사적 유물론의 시각으로 분석한 "조선사회경제사"를 저술함으로써 좌파 경제학자로서의 독보적 역량을 과시했던 백남운은 해방공간에서 여운형 등과 함께 중도좌파 노선을 견지하다 북으로 가 월북지식인중 가장 성공한 정치인으로 변신하게
한국에서 ‘헐하다’는 주로 ‘싸다(cheap)’는 뜻으로 쓰입니다. 그러나 북한에서 ‘헐하다’는 ‘힘이 들지 않아 어렵지 않다’(‘effortless’,‘easy’)라는 뜻이 먼저입니다. 남북한의 사전에서 ‘헐하다’를 찾아보아도 가장 먼저 설명하는 내용이 이처럼 다르게 나옵니다. 북한 사전에는 이런 예문이 소개돼 있습니다.“큰일인데 너무 헐하게 생각하지 말게”(This is a very important event, so don’t take it lightly.)북한에서는 친구에게 “너 오늘 맡은 작업이 헐했니?”(Was your
'홍도야 우지마라'쓴 극작술 귀재"홍도야 우지마라". 한국인의 영원한 누이 홍도를 통해, 가난하지만 정결했던 시대를 낭만적 감수성으로 떠올리게 하는 우리민족 정서의 부표(부표)와도 같은 연극이다.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이 될 수밖에 없었던 홍도가 오빠의 친구인 대학생과 결혼하지만 시댁 식구의 박해로 쫓겨났다가 결국 살인미수까지 저지르게 된다는 이야기.여성 수난극의 전형이자 "한국형 최루(催淚)극"의 원조가 될 만한 이 대중신파극의 명성에 비해, 이 극을 쓴 작가의 이름은 우리에게 낯설기만 하다. 임선규(임선규). 일제시대 최
북한에서 반찬은 ‘찔게’라고 합니다. 반찬이라는 말도 있긴 하지만 잘 쓰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북한 조선말대사전은 ‘찔게’를 “주로 밥에 곁들여 먹기 위하여 간을 맞추어서 만든 음식”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반찬이라는 말 대신으로 사용미국에는 ‘반찬’이나 ‘찔게’라는 개념이 없어 한국에 오면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비슷한 말은 ‘appetizer’ 나 ‘side dish’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appetizer’ 나 ‘side dish’는 남김 없이 다 먹는 게 보통입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 사람이 한국 식당에
'서로 속을 터놓는 친한 동무'북한에서 ‘딱친구’는 ‘둘도 없는 친구’ 또는 제일 친한 친구라는 뜻입니다. 남한에서는 쓰지 않는 말인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 풀이 한다면, ‘딱’ (just) 과 ‘친구’(friend) 가 결합된 것이지요. 딱 맞는 친구라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짐작됩니다. 영어로는 ‘best friend’ 또는 “bosom buddy”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딱친구’는 북한 조선말대사전에서 “서로 속을 터놓고 지내는 친한 동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말체(구어체)’라고 돼 있습니다.평생에 ‘딱친구’ 한 명만 있어
"노벨 의학상 감" 극찬서"배신자"로 낙인찍혀 추방..1950년대 북한 역사에 혜성처럼 등장해 한 시대를 풍미하다 10여 년만에 거의 흔적없이 몰락해 버린 한 의학자의 삶은 월북 지식인들의 행로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경우다. 전통 한의학의 과학화에 성공한 ‘세계적 의학자’로 북한이 한때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김봉한. 그의 등장과 퇴장은 북한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정치적 사건과 맞물려 있어 더욱 드라마적 요소가 짙다. 1956년 8월 평양에서 열린 노동당 8월 전원회의에서는 "8월 종파사건"이라 불리는 반(反)김일성사건으로 긴장이 고조
"정치"로 몰락한 고집센 현실주의 소설가 임화 숙청 주도 10년도 못돼 같은 운명의 길로 월북 문인 중 최고의 지위를 누리던 한설야는 1963년 2월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자강도의 한 협동농장으로 추방되었다. 당 문화부장, 문예총위원장, 교육상, 교육문화상, 작가동맹위원장,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지낸 그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순간이었을 것이다.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시절 이론과 소설창작 양면에 단연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던 그는 조선문학가총동맹의 위원장이 되면서 이미 거물급 정치인으로서 북한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
'개고기''a person with nerve'개고기(dog meat)를 북한에서는 단고기라고 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도 ‘개고기’라는 말이 쓰입니다. 하지만 뜻은 완전히 다릅니다. 북한의 조선말대사전(92년판)에서 ‘개고기’를 찾아보면 “성질이 막되고 고약한 사람(a person who is unrestrained and ill-tempered)을 비켜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남북한 사전에 모두 올라있는 ‘개차반’이라는 욕설과 비슷한 뜻이지만 ‘개고기’는 욕설은 아닙니다. 일상 생활에서 ‘개
현실과 민중-민족 이름위에 음악혼 불태운 천재 작곡가 "자유 독립 우리 나라, 깃발을 날려라" 도적처럼 몰래 찾아온 해방 앞에서 우리 민족은 '건국 행진곡'을 소리 높여 불렀다. 해방의 감격을 노래하고 외치는 소리의 축제였다. 음악사적으로는 민족음악의 기틀을 마련하는 순간이었다. 이 노래의 작곡가 김순남. 그 역시 예술인들의 '나라만들기' 열망이 정치적 활동으로 분출하고 결국 월북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밟게 된다. 그는 해방공간의 음악분야에서 실천적 좌파운동의 중심에 있었고, 임화의 시에 그가 곡을 부친 '인민항쟁가'는 그 주제가가
북한에서 ‘가두 여성’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을 영어로 ‘street woman’이나 ‘prostitute(윤락녀)’라고 옮기면 정말 큰일 납니다. 영화 Pretty Woman에 나오는 Julia Roberts가 아니랍니다. 여기서 ‘가두’는 ‘가두 연설(street oration)’ 이나 ‘가두 데모 (street demonstration)’ 처럼 ‘거리’라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북한의 ‘가두 여성’은 직장없이 가사에만 종사하는 주부, 즉 ‘전업 주부(house wife)’를 말합니다. 이때 ‘가두’는 혹시 ‘가두다’에서 나온
그림 통한 "남북이념 통합 꿈" 전쟁에 꺾여 포로교환때 북행...정치 외면 "화가의 길" 고집 이쾌대(李快大). 특이한 이름만큼이나 우리에게 아직 낯선 인물이다. 그러나 월북 예술인의 발자취를 찾는 여정에서 그의 존재를 피해 가기란 어렵다. 그의 그림은 남북한에 걸쳐 우뚝 솟은 거봉의 면모를 보인다. 해방공간에서 남북한 미술을 아우르는 독창적인 미학 이념을 만들어 낸 유일한 인물인 그가 우리에게 잊혀진 것은 전적으로 월북 화가라는 이력 때문이다. 역동적인 힘과 생명의지로 번득이는 조선 민중들의 나신상을 그린 「군상」시리즈1-4(19
미국 사람들의 새해 소망으로 가장 많이 꼽히는 것이 '살 빼기’라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인 중에도 많을 것 같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어떨까요? 북한에서는 다이어트(diet)를 ‘살 까기’ 또는 ‘몸 까기’라고 합니다. 물론 실제로 ‘살 까기’를 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다이어트 좀 해야겠어”는 “I’m going on a diet” 또는 “I have to lose some weight” 라고 옮길 수 있습니다. 만약 북한식 표현인 ‘나 살 까기 좀 해야겠어’를 그대로 영어로 옮겨, ‘I have to los
권력투쟁에 꺾인 좌파의 꿈...北문학사에 흔적없이 사라져 박헌영 따라 북행, 6ㆍ25 때 ‘인민항쟁??芳映맣【寗?안경 깨 자살 기도...끝내 총살형 당해월북 시인 임화(1908~1953)의 생애는 남북한 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극적인 드라마가 될 것이다. 다다이즘 시인으로 출발해 마르크스주의 문학운동을 표방한 단체인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서기장까지 올랐고 해방 후 월북했다 결국 처형당한 임화는 불행했다고 말하기에는 그의 운명적 요소가 지나치게 짙다. 임화가 '어버이 같은' 박헌영을 따라 해주 제1인쇄소로 간 것은 194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