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관리자의 모범사례 따라하기정춘실운동은 북한이 상업유통분야 종사자들의 충성심과 노력혁신을 유도하기 위해 펼치고 있는 대중적 노력경쟁운동이다. 북한이 79년 10월부터 사회 곳곳에서 묵묵히 맡은 바 업무에 충실한 사람들을 찾아내 상찬하고 그들의 모범사례를 널리 알려 주민들로 하여금 따라 배우게 했던 이른바 "숨은영웅 따라배우기운동"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이 운동은 1991년 김정일이 상업부문에서 당과 수령, 인민에 대한 충성심과 헌신적 복무정신으로 모범을 보였다는 자강도 전천군 상업관리소(상품공급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 소장 정춘
피에르 리굴로(프랑스 북한인권위원회 위원장, "사회사평론" 편집장)지난 여름 파리에서는 "WFP가 무작정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놓고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는 등 북한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9월 11일 미국 테러 이후로는 그런 질문이 쏙 들어갔다. 이곳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위협하는 새로운 적이 훨씬 걱정스러운 것이다. 나 역시 광신과 테러로부터 프랑스를 지키는 투쟁에 동참할 것이지만 북한사람들이 처한 참상에 대한 관심 또한 놓칠 수 없다. 나는 유럽과 아시아가 좀더 끈끈히 연대하기 위해
◇ 89년 평양축전을 앞두고 건설된 평양 만경대구역 광복거리의 원통형 아파트.멀리서 평양시내를 향해 서서히 카메라를 비추면 아파트단지의 위용이 눈부시다. 특히 광복거리에 늘어선 원통형, 와이(Y)자 형, 에스(S)자 형, 씨(C)자 형 등으로 된 고층아파트는 대체로 밋밋한 남한의 아파트 단지에 비해 기교가 돋보인다. 이런 패션감각의 아파트단지는 우선 북한의 주택정책에서 기인한다. 북한에서 주택은 원칙적으로 개인이 소유할 수 없다. 거주할 권리를 국가에서 배정받을 뿐이다. 실제로 들어가 사는 사람은 아파트의 형태나 실내공간에 대해 간
청산리정신은 주체사상과 혁명적 군중노선을 구현해 창조했다는 북한의 대중지도 사상을 말한다. 당초 농업부문을 대상으로 출발해 각 분야로 확대됐으며 공업부분에서는 "대안의 사업체계"로 정착했다.청산리정신·청산리방법이라는 용어는 김일성이 60년 2월 평남 강서군 청산리(현 남포시 강서구역 청산리) 당총회와 강서군 당위원회 사업을 현지지도하는 과정에서 창조됐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청산리를 찾은 김일성은 농민들과 숙식을 같이하면서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농촌의 실정과 농사현실을 구체적으로 파악한 뒤 청산리 당총회와 강서군 당위원회
'김정일 시대' 사회주의 건설 전략강성대국론은 북한이 김일성 사망(94.7.8) 후 김정일 시대 개막에 즈음해 제창한 사회주의건설의 전략목표 가운데 하나이다. 북한은 김일성 사후 공식 후계자인 김정일을 전면에 등장시키지 않은 채 한동안 김일성 후광에 힘입은 ‘유훈통???지속시켜 나갔다. 그러다가 "3년상"이 끝난 직후인 98년 9월 최고인민회의 제10기 1차회의에서 헌법을 개정, 국방위원장을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권력구조를 출범시키고 국방위원장에 김정일을 재추대함으로써 명실상부한 "김정일시대"를 열었다.북한이 공식 매체를 통해 강성
◇ 평양 보통강 기슭에 있는 빙상관(82년). 위 오른쪽의 '브라질리아성당'(오스카 니마이어, 59년)을 표절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평양축전 뒤 암흑기김정일이 저자로 돼 있는 "건축예술론"(조선로동당출판사, 1992년)은 북한의 ‘인민대학습당’(82년)을 최고의 건축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른바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이상적으로 잘 조화시켰다는 자평이다. 그러나 이같은 이념의 건축은 80년대를 통과하면서 급격히 퇴조하고 대신 현대적 감각의 건축이 구가된다.평양대극장(1960년)이 청기와를 겹겹이 인 ‘민족적 형식’
김일성 사망 후 체제 붕괴까지 거론되는 총체적인 위기 속에서 주민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체제유지를 위해 벌였던 몸부림을 통칭하는 말이다. 시기적으로는 식량난이 악화되기 시작된 95년부터 2000년 말까지 6년의 기간을 망라한다.흔히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라고 하면 1930년대 김일성 항일무장경력의 한 대목부터 연상한다. 북한 주장에 따르면 김일성이 인솔하는 항일유격대는 1938년 12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일제의 토벌에 쫓기며 남만주 몽강(현 정우)현 남패자에서부터 장백(長白)현 북대정자까지 행군했다. 남패자에서 북대정자까지는
일본 동북쪽 해안도시 니가타(新潟). 한 달에 두 번꼴로 북한으로 가는 여객선 만경봉호가 아직도 이곳에서 뜨고 있다. 70년대 말 요코다 메구미양을 비롯해 몇 명의 학생들이 이곳에서 북한으로 납치돼 간 사실이 최근 알려지면서 반북한 감정이 부쩍 높아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조총련계 동포들이 운영하는 초·중학교 과정의 조선학교가 있다. 한때 130~140명이 다닌 적도 있었으나 이제는 40명이 될까말까한 학생들만 남아 있다. 10명 정도의 교사들은 조선학교와 도쿄의 조선대학 출신이다. 이곳 한국영사관 관계자는 니가타현에는
김일성이 창안했다는 북한식 영농방법을 일컫는 말이다. 북한은 김일성이 70년대 초 농업분야 학자·농민들과 농사경험을 폭넓게 교환하고, 시험농장을 조성해 직접 작물을 재배하는가 하면 외국의 농업기술과 성과를 연구·분석해 북한 실정에 맞는 새로운 농사방법을 창안해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주체농법을 만들어낸 것은 북한 농업위원회(현 농업성) 산하 농업과학원 학자들과 관련 종사자들이며 특히 김만금 전 농업위원장과 서관히 전 당중앙위원회 농업담당 비서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일성은 다만 여기에 본인의 의견과 외국
'기념비적 건축물'◇ 78년 완공된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 일부.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성공적인 건축으로 꼽힌다. 오늘의 평양을 대표하는 ‘기념비적’ 건축물들이 솟아났던 80년대 초반을 북한은 "위대한 건설의 시대"라 부른다. 인민대학습당(1982년 완공), 평양산원(1980), 창광원(1980), 주체사상탑(1982), 청류관(1982),빙상관(1982), 개선문(1982), 창광거리 고층아파트단지(1980년1단계 착공) 등이 이때 계획되고 지어졌다. 98년 수령형상문학으로 나온 소설 "전환의 년대"(리신현 작)는 당시를 ‘건
'조선노동당의 뿌리' 주장김일성이 1926년 10월 만주 화전(樺甸)에서 결성했다고 북한이 주장하는 반일청년조직으로, 북한의 공식 문헌에 (‘트·드’로 읽는다)라는 약칭으로 자주 등장한다.북한은 타도제국주의동맹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되는 공산주의적 혁명조직"(노동당 규약)으로 정의하고 있다. 또한 이 조직이 조선노동당의 뿌리이자 "조선인민의 참된 혁명역사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하면서 타도제국주의동맹이 결성됐다는 1926년 10월을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시대구분의 기준점으로 삼고 있기도 하다.북한의 공식 출판물에 타도제국주의
군사작전 원용한 사회주의 건설방식북한 특유의 사업추진방식을 일컫는 말로 "모든 사업을 전격적으로 밀고 나가는 사회주의건설의 기본전투방식"으로 정의된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사업을 최대한 빨리 밀고 나가면서 그 질을 가장 높은 수준에서 보장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속도와 내실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겠다는 것이다.북한은 일찍이 50년대에 '평양속도', 60년대에 '비날론속도'·'강선속도' 등에서 속도라는 용어를 사용해 왔다. 그러다가 70년대 초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도아래 혁명가극 '한 자위단원의 운명
북한에는 ‘노동계급의 당’(공산당)이라고 일컫는 조선노동당 외에 조선사회민주당과 천도교청우당이라는 두 개의 정당이 더 있다. 이들 두 정당을 북한에서는 우당(友黨)이라고 부른다.우당이란 말 그대로 ‘벗으로 되는 정당’이라는 뜻이며 ‘노동계급의 당을 지지하며 노동계급의 당과 통일전선을 이룬 단계에 있는 정당’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우당은 우리가 생각하는 야당과는 전혀 다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91년 5월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꾼과 한 ‘인민대중 중심의 우리 식 사회주의는 필승불패이다’제하의 담화에서 "사회주의 사회는 계급적 차이를 비
얼마 전 북한을 다녀온 중국 조선족 약재상은 “지금 북한에선 중국 화폐가 북한 돈처럼 쓰이고 있다”고 전했다. 국경지대는 물론, 청진 일대의 장마당에서도 중국 위안화가 거침없이 통용되고 있고 북한 당국도 이를 방치해 놓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평양을 비롯한 주요도시의 외화상점이나 국경지대의 암달러상들에게는 미국 달러와 일본 엔에 이어 중국 위안화가 인기품목이 되었다. 국경지대에서는 달러나 엔을 제치고 위안화가 훨씬 많이 통용되고 있다고 한다. 달러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 서방세계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의심받을 위험도 있지만 중
1985년 아들을 만나기 위해 북한을 찾은 한 조총련계 할머니는 아들과의 잠자리에까지 보위원이 끼어드는 어이없는 일을 당했다. 할머니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비슷한 일을 겪은 다른 조총련계 방북자들과 함께 북한당국과 조총련에 항의를 했고, 이후 보위원이 잠자리에 끼는 일은 없어졌다. 또다른 조총련계 재일교포는 북한 친척집을 방문했을 때 조용필 노래를 틀었다. 즉각 보위원이 달려와 제지했지만 그는 보위원과 멱살을 잡고 싸우다시피 하며 노래를 끝까지 들었다. 친척들의 심장은 콩알만해졌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김일성 김정일 사
당위원회서 공장·관리 운영..생산의 비능률·불균형 초래김일성은 1961년 12월 당중앙위 제4기 2차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인민경제에 대한 지도관리를 전면 쇄신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어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남포시 대안(大安)전기공장을 찾아 10여 일간 머물면서 공장의 전반적인 실태와 형편을 파악한 후 12월 중순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새로운 공업관리체계를 제시했는데 그것이 "대안의 사업체계"이다. 이 체계는 내용상 공장 당위원회의 집체적 지도에 기초해 공장을 관리운영하고, 생산에 대한 기술적 지도를 강화하며, 자재
◇ 북한이 1979년부터 발간하기 시작한 김일성의 대표적 저작문헌집인 '김일성저작집'김일성의 이름으로 발표된 연설 담화 보고 서한 결론 등 각종 문서들을 연대별로 정리해 묶어 펴낸 대표적인 김일성저작 문헌집이다. 1979년 4월 조선로동당출판사에서 제1권이 출간된 이래 96년 6월 제44권이 나옴으로써 발간사업은 일단 완료됐다. 여기에는 김일성이 1930년 6월 주체사상의 원리를 처음 천명했다는 이른바 카륜회의 보고부터 그의 생전 마지막 회의록으로 기록되는 94년 7월의 "7월6일 유훈교시"까지 총 1405건의 문헌이 실려 있다.
◇ 북한이 88년부터 8년간에 걸쳐 펴낸 20권 짜리 역사문화 화보 자료집. 원시부터 근세(조선조)까지 각 시대를 대표하는 1303개의 유적, 약 1만여 점의 유물 자료가 9948건의 사진, 2254건의 도면, 기타 여러 가지 도안 형태로 수록돼 있다.북한이 1988년부터 8년 간에 걸쳐 펴낸 20권짜리(총 6276쪽) 역사·문화 화보 자료집이다. 원시부터 근세(조선조 말기)까지 각 시기마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유물들의 원색사진과 도면을 유형별로 편집했다. 구체적으로 건축, 성곽, 분묘, 벽화, 석조물, 회화, 자기, 조각,
어림없다. 'ridiculous'‘어방없다’는 말은 북한에서 많이 쓰입니다. ‘턱도 없다’(ridiculous) ‘어림없다’(nonsensical, preposterous)는 뜻입니다. 북한 조선말 대사전에서 ‘어방없다’는 “어림조차 할 수 없게 굉장하거나 터무니 없다”라고 설명돼 있습니다. ‘어방을 대다’는 “어림짐작으로 헤아리다”는 뜻이고, ‘어방 잡다’는 “어림 잡다”와 같은 뜻입니다. 북한에서 어림없다, 어림잡다는 말도 함께 쓰입니다. /마이카 애들러 기자 mycar@chosun.com
◇ 북한 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가 펴낸 팔만대장경 해제. 88년 사회과학출판사에서 전25권으로 출간됐으며, 91년에는 15권으로 재출간됐다. 국내에서는 94년부터 판매되고 있다. 북한 고전연구의 산실인 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가 1988년 펴낸 25권짜리 팔만대장경(고려대장경) 해제이다.‘팔만대장경’은 평북 향산군 묘향산의 역사박물관(보현사)에 보관돼 있는 팔만대장경 목판본을 원전으로 사용했다. 민족고전연구소는 1500여종, 6000여권에 이르는 판본의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고 종류별로 개괄적인 설명을 담아 ‘팔만대장경’을 엮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