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9일 몽골 동포간담회에서 “언제 어디서든 무슨 내용을 얘기해도 좋으니 (김정일 위원장과) 만나서 얘기하자고 수십 번 말했다. (북한에 대해) 많은 양보를 하려 한다. 제도적, 물질적 支援지원 이런 것은 조건 없이 하려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韓한·美미 연합훈련이 북한에서 보기에 불안한가 보다. 어찌 보면 시비일 수도 있고, 실제로 불안할 수 있는 여러 사정이 있다”고 했다.조건 없이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북한에 대한 대폭적 지원과 양보를 시사하는 대통령의 발언은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다. 지금까지는 이 두 가지를 “北核북
오늘(10일)과 내일 이틀간 금강산에서 ‘남북대학생 대표자회의’라는 행사가 열린다.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을 주축으로 한 남쪽 대학생 357명과 북쪽의 120여명이 모여 ‘6·15 공동선언을 고수하고 반통일 好戰호전세력을 청산하자’는 공동결의문을 낼 것이라고 한다. 1996년 이래 10년째 利敵이적단체 명찰을 떼지 못하고 있는 한총련이 당당하게 통일부의 訪北방북허가를 얻어 이런 불장난을 할 수 있는 게 지금의 대한민국이다.대법원도 1998년과 2003년, 올해 초 잇따라 한총련이 이적단체임을 확인하는 판결을 했다. 통일부가 대
탈북자 6명이 東南亞 제3국을 거쳐 5일 밤 미국에 도착했다고 브라운백 美 상원의원이 밝혔다. 미국이 2004년 제정한 북한人權法에 따라 일반 탈북자를 받아들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브라운백 의원은 “탈북자 인권문제가 미국 대북정책의 일부분이 됐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탈북자 인권, 나아가 북한 인권문제는 미국 대북정책의 일부 정도가 아니라 핵심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駐韓 미국대사관이 “백악관 지시”라며 부시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레프코위츠 북한인권 특사와 얘기를 나누는 사진을 국내 언론에 배포한 것도 부시 행정부가 북한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시위대가 5일 오후 軍·警이 미군기지 移轉예정지 평택 대추리에 전날 쳐놓은 철조망 20여곳을 뚫었다. 시위대는 군인과 경찰을 향해 끝이 여러 가닥으로 갈라진 죽봉을 휘두르며 군의 宿營地와 건설장비를 부쉈다. 작년 7월 평택 시위에서 경찰 한 명의 눈을 찔러 失明케 했던 바로 그런 죽봉이다. 병사들은 “얻어맞더라도 맞대응하지 말라”는 국방부 지침에 따라 폭력 시위대에 제대로 맞서지 못하고 매타작을 맞았다. 4·5일 이틀 시위로 경찰 146명, 군인 31명, 시위대 95명이 부상했다고 한다. 중상자는 군·경이 32명
지난 4일은 정말 답답한 하루였습니다. 군·경이 미군기지가 옮겨갈 경기도 평택의 대추리에 대한 작전을 감행한 날이었습니다. 연좌 농성과 물대포, 쇠파이프와 죽봉, 강제 진압, 연행…. 수십년 가까이 지겹도록 겪어온 일이 또 다시 평택 팽성읍의 계성초등학교 대추분교라는 작은 시골학교에서 벌어진 것입니다.그날 줄곧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던 섬뜩한 문구 하나가 있었습니다. 대추분교의 점령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반미(反美) 운동가들이 퍼뜨린 ‘대추분교가 제2의 전남도청이 되고 있다’는 선동 문구입니다. 1980년 광주사태 때 고립된 시민과
김대중 정부시절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장성민 전 의원은 최근 ‘팔십 노구 DJ가 방북하는 다섯 가지 이유’란 글을 썼다. 그는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인데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면 우선 그의 답방(答訪)을 요구하고, 그것이 안 되면 제주도나 개성, 도라산역에서라도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야 한다고 설득하고, 그것까지 여의치 않을 경우 평양에서라도 회담을 하라고 할 것이라고 했다.정상회담 연연 안해 김 전 대통령의 생각이 이와 똑같은지는 알 수
5월이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것은 1982년이었다. 대학생들은 1980년의 뜨거운 민주화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결국 민주화에 실패하고 군부에 다시 권력을 넘겨주었다는 생각에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속에 불덩이를 감추고 있었다. 내가 처음 대학에 들어갔을 때 대학은 조용했다. 시위가 산발적으로 있었지만 시위가 시작되면 30초 안에 시위대에 비해 2~3배나 많은 수의 사복경찰관들이 서울대 캠퍼스 어디선가에서 튀어나와 시위를 진압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울분과 분노를 마음속에 쌓아갔다. 우리가 대학 다닐 때 가장
레프코위츠 미국 북한 人權인권 特使특사가 4월 28일자 월스트리트저널 기고에서 “일부 정부가 제대로 모니터링도 하지 않고 대량 원조를 하는 것은 북한 정권 유지만 도와주는 것이다. 개성공단 입주 한국기업이 북한 근로자에게 주는 2달러 이하 日當일당도 제대로 전달되는지 보장할 수 없다”고 한 데 대해 정부 당국자는 30일 “편파적 시각이고 內政干涉내정간섭”이라고 반박했다. 통일부도 별도 논평에서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부정하는 것은 북한주민의 어려운 상황을 외면한 것으로 反반인도적 反반인권적 태도이며 일방적이고 單線的단선적인 태
정부‘7차 북한인권 국제회의’에 가는 뜻은 정부 “기존회의와 달리 실질문제 다뤄… 북한, 자유보다 먹는 문제가 우선”주최측 “국제이슈화 되자 정부서 무시못해” 우리 정부가 인권단체 주관의 북한인권·난민문제 국제회의에 박경서 인권대사와 김영석 주노르웨이 대사 등을 왜 참석시키기로 했을까. 정부의 이번 조치는 그동안 유지해온 “참관하되 참여하지 않는다”는 원칙과 다른 것이다. 1999년부터 6차례 북한인권회의가 열리는 동안 정부는 북한을 자극할 수 있다며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정부 “기존 대회와 달라”정부 당국자는 “과거 이 회
그저께 탈북소녀 김한미양이 백악관 집무실에서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만났을 때 앉았던 자리는 원래 부통령이 앉는 곳이다. 부시 대통령은 자기 오른쪽 그 부통령 자리에다 한미양을 번쩍 들어다 앉혀놓았다. 이 천진난만한 여섯 살 아이는 온갖 장난을 쳤다. 부시 대통령이 북한에 납치된 요코다 메구미의 어머니가 준 책을 펴자 거기에 끼어들어 이리저리 책갈피를 젖혔고 부시 대통령 귀에다 입을 대고 “I love you(사랑해요)”라고 속삭였다. 부시는 그런 한미양을 보며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즐거워했다. 한미양이 그린 자신의 얼굴그림을 오른쪽
근현대(近現代) 러시아 혁명사의 중요한 두 페이지가 넘어가는 데는 꼭 166년의 세월이 걸렸다. 1825년의 데카브리스트(12월 당) 반란에서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까지가 92년, 그로부터 소련연방이 해체되기까지가 74년이 걸렸다. 이에 비한다면 당대 한국의 정치변동사는 너무나 빠르게 돌아갔다. 1960년의 4·19 혁명에서 5·16 쿠데타까지가 1년, 그로부터 1987년의 개발독재 종식까지 26년, 노태우 과도기와 김영삼 문민정부 10년, 그리고 김대중·노무현 ‘민족 민주 민중’ 시대 8년, 그야말로 46년간의 초(超) 스피드
1977~78년 납북됐던 김영남씨 등 고교생 5명이 南派남파간첩 교관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1997년 檢擧검거 간첩과 2000년 이후 탈북자들 증언을 통해 확인했다고 국가정보원장이 27일 국회에서 밝혔다. 그런데도 정부는 최근 열린 남북장관급회담에서도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국정원은 밝혔다. 납북자 부모들은 30년 전 잃어버린 자식이 살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소식을 報道陣보도진에게서 전해 듣고 “정부가 어떻게 여태 알려주지 않을 수 있느냐”고 말했다고 한다.일본에서 북한에 강제 납치됐다 김영남씨와 결혼한 것으로 확인된
“법은 이성에 기초하는 것이고, 나와 내 신하들도 판사들만큼 이성을 갖고 있소.” 영국의 국왕 제임스 1세는 모든 판사들을 불러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왕이 원한다면 웨스트민스터홀에 앉아서 어떤 법원의 어떤 사건도 판사가 아닌 어떤 신하를 통해서라도 재판할 수 있다는 선언이었다. 이에 대해 영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법률가 중 한 사람이었던 에드워드 코크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폐하는 영국의 법과 신민들의 생명, 재산에 관계되는 권리 주장에 관하여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 주장들은 자연적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술적 이성을 오랫동
평양에서 24일 끝난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우리 대표단이 金大中김대중 전 대통령의 6월 중 訪北방북 의사를 전달한 데 대해 北側북측은 “기본적으로 의견을 같이 했다”고 우리 수석 대표인 이종석 통일부 장관이 밝혔다. 이 장관은 “구체적인 날짜와 일정, 방북단 규모, 열차 이용 여부 및 절차에 대해선 5월 중 실무 협의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이 장관 말처럼 일이 진행된다면 김 전 대통령은 2000년 6월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지 꼭 6년 만에 다시 북한 땅을 밟고 김정일 국방 위원장을 만나게 될 것이다. 김 전 대통령으로선
대북(對北)문제에 관한 한 김대중 정부는 ‘햇볕정책’과 ‘퍼주기’로 일관했다. 자신의 정치적 업적을 북한과의 교류, 김정일과의 회담에 설정한 김 전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그것의 실현에 전력 투구했다. 그 덕에 DJ는 6·15회담을 성취했고 노벨평화상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국내에서는 나라를 갈등으로 몰아간 결과를 가져 왔다. 그는 철저히 업적주의에 매달렸다. 북한과의 관계에서 무엇인가 사태를 극적으로 전환시키는 쇼 같은 것을 연출하려 했다. 평양 방문과 6·15 선언이 그 대표 작품이었다. 다시 말해 북한과의 실질적 개선 즉 정치적 화
庾龍源군사전문기자경기도 평택시 팽성읍의 166만평 부지에 자리잡은 미군기지 ‘캠프 험프리’는 1961년 한국에서 헬리콥터 사고로 순직한 미군 벤자민 K 험프리 준위의 이름을 딴 것이다.항공 수송, 통신, 의무, 헌병 등 지원부대와 정보수집 부대가 주로 자리잡고 있다. 때문에 주력 전투부대에 비해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런 캠프 험프리가 최근 미군기지 이전 반대 세력과 정부 당국의 충돌로 언론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군 안팎에선 평택 미군기지 이전계획이 일부 주민과 ‘평택 미군기지 확정 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의 강력한
신언상 통일부 차관이 며칠 전 공개 강연에서 “세계 각국 인권단체들이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엄청 떠들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 뭐가 있느냐”며 “피켓 들고, 데모하고, 시위하고, 성명서 낭독한다고 인권문제가 해결될 것 같으면 우리도 100만장의 성명서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이 이 정권의 本心본심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래야만 이 정권 下하에서 차관 자리라도 부지하며 밥을 벌어 먹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건 너무 지나쳤다.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게 야박하고 몰상식한 言辭언사를 弄농하는 통일부 차관의 얼마 전
1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사당. 대한민국 국무총리 지명자 인사청문회가 열린 제3회의실 내부는 마치 일본 총리의 청문회장이라도 된 듯 일본 언론들로 북적댔다. NHK, 후지TV, NTV, TBS, TV아사히 등 거의 모든 방송사와 아사히, 요미우리, 마이니치 등 메이저 신문 특파원들이 녹음기와 펜을 들이댔다. 이날 청문회 참석자는 납북자 김영남씨 가족. 김씨는 북한으로 피랍된 일본인 요코다 메구미의 남편으로 최근 확인된 인물이다.NHK 취재팀 관계자는 “납치된 일본인 메구미와 관련된 이야기가 하나라도 있을까 기대하고 다들 몰려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17일 국회에서 “북한에 억류 중인 拉北者납북자와 국군포로 문제를 풀기 위해 북한에 과감한 경제적 지원방식을 제안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장관은 “우리의 목표는 납북자의 생사를 확인하고 모셔오는 것이다. 국가 責務책무라는 차원에서 필요한 대가를 치르겠다”고 했다.북한은 여태까지 납북자의 존재를 인정한 적이 없다. 정부 역시 이런 북한 눈치를 보느라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조차 꺼려 왔다. 그랬던 정부의 主務주무부처 장관이 납북자 문제를 풀겠다고 말했으니 이것도 진전이라면 진전인 셈이다.엄격히 따지자면 납북자
姜哲煥 정치부 기자·1992년 탈북11일 밤 80세를 일기로 작고한신상옥(申相玉) 감독의 소식을 북한 주민들이 안다면 남한 사람들 못지않게 애도할 것이다. 신 감독은 북한 인민에게도 지울 수 없는 추억과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1978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홍콩에서 북한으로 납치된 후 신 감독은 부인 최은희 여사와 함께 17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북한에서 볼 수 없던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였다. 신 감독이 만든 ‘철길을 따라 천만리’라는 영화에서, 우산으로 가리기는 했지만 남녀가 키스하는 장면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