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효순·미선양이 훈련 중인 미군 장갑차에 숨진 사건은 이 땅에 反美운동을 常時化·전국화·조직화하는 계기였다. 바로 이 효순·미선양 사건의 前衛로 나섰던 ‘여중생 汎對委’ 소속단체 52개 중 33개가 평택 미군기지 범대위에도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은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 소요가 현지 농민의 농지 경작권과 無關한 反美 이념투쟁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여중생 범대위가 자신들의 홈페이지에 게시한 범대위 투쟁기록만 봐도 분명하다. 여중생 범대위는 ‘2003년 투쟁일지’에 을지포
美미 국무부는 15일 “앞으로 45일 안에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하고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에 미국대사관을 개설하는 등 외교관계를 전면 정상화한다”고 밝혔다. 리비아가 2003년 12월 核핵무기를 비롯한 大量殺傷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 포기를 선언하고 이를 실천해온 데 따라 1980년 단절됐던 美미·리비아 관계가 26년 만에 復元복원되는 것이다.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리비아는 북한과 이란 같은 나라에 중요한 모델”이라고 말했다.미국이 이번에 리비아에 취한 조치는 1993년 1차 北核북핵위기 이후 10여년 동안 북한이 미국에
한국은 ‘존재감’이 강한 나라다. 워싱턴에 있을 때 미국 기자나 학자 친구들은 “한국에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했다. 설명하기 어려운 ‘국가적인 끼’를 갖고 있다는 얘기다.텍사스주 지역신문 기자가 ‘한국의 저출산 현상’을 취재하러 서울로 날아가고, 미국의 어느 작가가 ‘한국 여성의 의식변화’를 추적한 책을 준비할 때, ‘한국이니까’ 관심을 갖는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지난 반세기 동안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스타 국??缺?‘신동(神童)국??撰?남다른 기질과 자신감을 갖게 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
南北남북은 오는 25일 京義線경의선과 東海線동해선의 남북철도를 시험운행하기로 했다. 경의선은 남측 문산역을 출발해 북측 개성역까지, 동해선은 북측 금강산역을 출발해 남측 제진역까지 왕복 운행한다. 남북은 또 16일 남북將星級장성급회담과 김대중 前전 대통령의 訪北방북준비 실무접촉을 갖는다. 6·25전쟁 중이던 1951년 6월 12일 운행이 끊겼던 경의선을 따라 55년 만에 열차가 달리게 된다. 다음달로 예정된 김 전 대통령의 평양방문도 김 전 대통령 희망대로 경의선 철도를 통해 이뤄질 가능성이 높아졌다.경의선 남북연결사업은 2000년
대통령의 외국 방문을 隨行하고 있는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11일 대통령이 “조건 없이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북한에 대한 대폭적 지원과 양보를 하겠다”고 한 9일 몽골 발언에 대해 “한반도문제의 當事者인 한국 대통령으로서 解法을 제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보면 된다. 우리는 슬로건(구호)이 아니라 솔루션(해법)을 찾으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서울의 정부 고위관계자는 “한반도의 운명을 미국에만 맡겨둘 수 없다는 생각”이라고 했다. 문정인 국제안보대사도 이날 서울 세미나에서 “대통령의 몽골 발언은 부시 미 대통령에게 인내심을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부시 미국 대통령을 만났다. 백악관의 주인은 자기 옆, 부통령의 자리에 일곱 살 한미를 번쩍 들어 앉히면서 탈북자들과 마주 앉았다. 언어가 달랐지만 언어의 다름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통령과 탈북자라는 신분의 차이가 있었음에도 가족적인 분위기였다. 탈북자들은 이야기 했고, 대통령은 듣기를 원했다. 한미의 아빠 김광철씨는 임신 5개월째인 아내를 데리고 북한을 탈출해야 했던 이유를 “고향 땅에서 자행되던 공개 처형, 그 끔찍한 광경들을 목격하면서 그 땅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미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몽골의 울란바토르에서 “북한에 많은 양보를 하려고 한다”고 한 발언의 파장을 취재하기 위해 10일 외교부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었다.―대통령 발언이 한미관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나.“아직 뭐라고 말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북핵은 언급되지 않았는데.“청와대에 문의를 해 달라. 지금은 말 할 수 있는 게 없다.”외교부 다른 관계자 답변도 비슷했다. “조금 더 발언배경을 파악한 후 말하겠다” 는 것이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설명이었다. 이후 몇 번의 취재도 같았다.문제는 이런 일이 이번뿐이 아니라는 데
대통령은 9일 몽골 동포간담회에서 “언제 어디서든 무슨 내용을 얘기해도 좋으니 (김정일 위원장과) 만나서 얘기하자고 수십 번 말했다. (북한에 대해) 많은 양보를 하려 한다. 제도적, 물질적 支援지원 이런 것은 조건 없이 하려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韓한·美미 연합훈련이 북한에서 보기에 불안한가 보다. 어찌 보면 시비일 수도 있고, 실제로 불안할 수 있는 여러 사정이 있다”고 했다.조건 없이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북한에 대한 대폭적 지원과 양보를 시사하는 대통령의 발언은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다. 지금까지는 이 두 가지를 “北核북
오늘(10일)과 내일 이틀간 금강산에서 ‘남북대학생 대표자회의’라는 행사가 열린다.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을 주축으로 한 남쪽 대학생 357명과 북쪽의 120여명이 모여 ‘6·15 공동선언을 고수하고 반통일 好戰호전세력을 청산하자’는 공동결의문을 낼 것이라고 한다. 1996년 이래 10년째 利敵이적단체 명찰을 떼지 못하고 있는 한총련이 당당하게 통일부의 訪北방북허가를 얻어 이런 불장난을 할 수 있는 게 지금의 대한민국이다.대법원도 1998년과 2003년, 올해 초 잇따라 한총련이 이적단체임을 확인하는 판결을 했다. 통일부가 대
탈북자 6명이 東南亞 제3국을 거쳐 5일 밤 미국에 도착했다고 브라운백 美 상원의원이 밝혔다. 미국이 2004년 제정한 북한人權法에 따라 일반 탈북자를 받아들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브라운백 의원은 “탈북자 인권문제가 미국 대북정책의 일부분이 됐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탈북자 인권, 나아가 북한 인권문제는 미국 대북정책의 일부 정도가 아니라 핵심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駐韓 미국대사관이 “백악관 지시”라며 부시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레프코위츠 북한인권 특사와 얘기를 나누는 사진을 국내 언론에 배포한 것도 부시 행정부가 북한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시위대가 5일 오후 軍·警이 미군기지 移轉예정지 평택 대추리에 전날 쳐놓은 철조망 20여곳을 뚫었다. 시위대는 군인과 경찰을 향해 끝이 여러 가닥으로 갈라진 죽봉을 휘두르며 군의 宿營地와 건설장비를 부쉈다. 작년 7월 평택 시위에서 경찰 한 명의 눈을 찔러 失明케 했던 바로 그런 죽봉이다. 병사들은 “얻어맞더라도 맞대응하지 말라”는 국방부 지침에 따라 폭력 시위대에 제대로 맞서지 못하고 매타작을 맞았다. 4·5일 이틀 시위로 경찰 146명, 군인 31명, 시위대 95명이 부상했다고 한다. 중상자는 군·경이 32명
지난 4일은 정말 답답한 하루였습니다. 군·경이 미군기지가 옮겨갈 경기도 평택의 대추리에 대한 작전을 감행한 날이었습니다. 연좌 농성과 물대포, 쇠파이프와 죽봉, 강제 진압, 연행…. 수십년 가까이 지겹도록 겪어온 일이 또 다시 평택 팽성읍의 계성초등학교 대추분교라는 작은 시골학교에서 벌어진 것입니다.그날 줄곧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던 섬뜩한 문구 하나가 있었습니다. 대추분교의 점령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반미(反美) 운동가들이 퍼뜨린 ‘대추분교가 제2의 전남도청이 되고 있다’는 선동 문구입니다. 1980년 광주사태 때 고립된 시민과
김대중 정부시절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장성민 전 의원은 최근 ‘팔십 노구 DJ가 방북하는 다섯 가지 이유’란 글을 썼다. 그는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인데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면 우선 그의 답방(答訪)을 요구하고, 그것이 안 되면 제주도나 개성, 도라산역에서라도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야 한다고 설득하고, 그것까지 여의치 않을 경우 평양에서라도 회담을 하라고 할 것이라고 했다.정상회담 연연 안해 김 전 대통령의 생각이 이와 똑같은지는 알 수
5월이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것은 1982년이었다. 대학생들은 1980년의 뜨거운 민주화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결국 민주화에 실패하고 군부에 다시 권력을 넘겨주었다는 생각에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속에 불덩이를 감추고 있었다. 내가 처음 대학에 들어갔을 때 대학은 조용했다. 시위가 산발적으로 있었지만 시위가 시작되면 30초 안에 시위대에 비해 2~3배나 많은 수의 사복경찰관들이 서울대 캠퍼스 어디선가에서 튀어나와 시위를 진압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울분과 분노를 마음속에 쌓아갔다. 우리가 대학 다닐 때 가장
레프코위츠 미국 북한 人權인권 特使특사가 4월 28일자 월스트리트저널 기고에서 “일부 정부가 제대로 모니터링도 하지 않고 대량 원조를 하는 것은 북한 정권 유지만 도와주는 것이다. 개성공단 입주 한국기업이 북한 근로자에게 주는 2달러 이하 日當일당도 제대로 전달되는지 보장할 수 없다”고 한 데 대해 정부 당국자는 30일 “편파적 시각이고 內政干涉내정간섭”이라고 반박했다. 통일부도 별도 논평에서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부정하는 것은 북한주민의 어려운 상황을 외면한 것으로 反반인도적 反반인권적 태도이며 일방적이고 單線的단선적인 태
정부‘7차 북한인권 국제회의’에 가는 뜻은 정부 “기존회의와 달리 실질문제 다뤄… 북한, 자유보다 먹는 문제가 우선”주최측 “국제이슈화 되자 정부서 무시못해” 우리 정부가 인권단체 주관의 북한인권·난민문제 국제회의에 박경서 인권대사와 김영석 주노르웨이 대사 등을 왜 참석시키기로 했을까. 정부의 이번 조치는 그동안 유지해온 “참관하되 참여하지 않는다”는 원칙과 다른 것이다. 1999년부터 6차례 북한인권회의가 열리는 동안 정부는 북한을 자극할 수 있다며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정부 “기존 대회와 달라”정부 당국자는 “과거 이 회
그저께 탈북소녀 김한미양이 백악관 집무실에서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만났을 때 앉았던 자리는 원래 부통령이 앉는 곳이다. 부시 대통령은 자기 오른쪽 그 부통령 자리에다 한미양을 번쩍 들어다 앉혀놓았다. 이 천진난만한 여섯 살 아이는 온갖 장난을 쳤다. 부시 대통령이 북한에 납치된 요코다 메구미의 어머니가 준 책을 펴자 거기에 끼어들어 이리저리 책갈피를 젖혔고 부시 대통령 귀에다 입을 대고 “I love you(사랑해요)”라고 속삭였다. 부시는 그런 한미양을 보며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즐거워했다. 한미양이 그린 자신의 얼굴그림을 오른쪽
근현대(近現代) 러시아 혁명사의 중요한 두 페이지가 넘어가는 데는 꼭 166년의 세월이 걸렸다. 1825년의 데카브리스트(12월 당) 반란에서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까지가 92년, 그로부터 소련연방이 해체되기까지가 74년이 걸렸다. 이에 비한다면 당대 한국의 정치변동사는 너무나 빠르게 돌아갔다. 1960년의 4·19 혁명에서 5·16 쿠데타까지가 1년, 그로부터 1987년의 개발독재 종식까지 26년, 노태우 과도기와 김영삼 문민정부 10년, 그리고 김대중·노무현 ‘민족 민주 민중’ 시대 8년, 그야말로 46년간의 초(超) 스피드
1977~78년 납북됐던 김영남씨 등 고교생 5명이 南派남파간첩 교관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1997년 檢擧검거 간첩과 2000년 이후 탈북자들 증언을 통해 확인했다고 국가정보원장이 27일 국회에서 밝혔다. 그런데도 정부는 최근 열린 남북장관급회담에서도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국정원은 밝혔다. 납북자 부모들은 30년 전 잃어버린 자식이 살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소식을 報道陣보도진에게서 전해 듣고 “정부가 어떻게 여태 알려주지 않을 수 있느냐”고 말했다고 한다.일본에서 북한에 강제 납치됐다 김영남씨와 결혼한 것으로 확인된
“법은 이성에 기초하는 것이고, 나와 내 신하들도 판사들만큼 이성을 갖고 있소.” 영국의 국왕 제임스 1세는 모든 판사들을 불러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왕이 원한다면 웨스트민스터홀에 앉아서 어떤 법원의 어떤 사건도 판사가 아닌 어떤 신하를 통해서라도 재판할 수 있다는 선언이었다. 이에 대해 영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법률가 중 한 사람이었던 에드워드 코크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폐하는 영국의 법과 신민들의 생명, 재산에 관계되는 권리 주장에 관하여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 주장들은 자연적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술적 이성을 오랫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