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1973년 평양 출생. 97년 탈북. 연세대 법학과 재학북한에서 아리랑축전이 한창이라고 한다. 고등중학교(중고교) 3학년때까지 나도 죽 집단체조에 참가했다. 10kg이상 되는 카드섹션 책을 매고 다니던 일, 동작 실수로 부모들이 학교로 불려가 밤새 사상투쟁 회의에 시달려야 했던 일, 소낙비에 얇은 운동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드러나는 신체를 감추려고 안간힘을 쓰던 일, 뙤약볕에서 물구나무서기 훈련을 계속 하다보니 머리에 하얗게 이가 달라붙어 어머니가 울상이 된 채 밤새 무릎에 눕혀놓고 잡아주던 일...점심시간은 그래도 신이 났다.
서영석두만강을 건너며 언제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 아쉬움과 눈물로 고향을 떠났다. 내 고향은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이다. 온천이 좋기로 소문이 나서 북한 전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온천욕을 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학교 뒷산 밤나무에 올라가 지팡이로 덜 익은 밤을 두들겨 따 구워먹으려다가 경비원 아저씨에게 들켜 걸음아 날 살려라 정신없이 줄행랑을 놓던 때가 엊그제 같다.고향은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곳이겠지만, 그곳에서의 고등중학교(남한의 중고교를 합친것) 시절은 참 그립다. 5학년 때, 스물셋의 여자 국어선생님이 부임해 오셨
박선화 고향을 떠나온 지 4년. 나는 양강도 혜산에서 여자고등중학교를 다녔다. 졸업반이 가까워지면 누구나 대학, 군대, 또는 직장 등으로 진로를 정하고 제각기 준비를 했다. 김일성종합대학이나 김책공대에 들어가는 학생도 나오고, 군에 입대에 군 간호사가 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다가 20대 중반이 되면 대부분 주부가 된다. 생활의 전사가 되는 것이다. 주부가 된 내 친구 중에는 남편과 함께 이악스러운 삶의 현장에 나타나기도 했다. 어린 시절 우리에게 젖줄기처럼 달콤했던 압록강이 바로 그곳이다. 구리, 아연, 코발트, 니켈, 납… 값이
중·소분쟁 격화 등 대내외 정세변화 대처'김일성 직계' 빨치산 출신 당중앙위 집결북한은 1966년 10월 12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14차 전원회의를 열고 대대적인 당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1946년 8월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의 합당으로 북조선노동당이 출범한 이후 20년 간 당의 기본 골격으로 유지해온 위원장·부위원장 직제를 폐지하고 당중앙위원회 총비서·비서제로 개편했다. 당의 노선과 정책을 집행하고 당사업을 일상적으로 조직하기 위해 당중앙위원회 안에 비서국을 신설했으며, 당과 국가사업을 일상적으로 협의하기 위해 당중앙위원회
6·25전쟁이 휴전으로 봉합된 후 「전후복구 3개년계획」(1954∼56년)을 통해 전쟁의 상처를 추스린 북한은 본격적인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시동을 걸어 1957년부터 5개년계획에 들어간다. 5개년계획은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킨다』는 전후 노동당의 경제건설 기본노선에 기초해 사회주의 공업화의 기초 축성과 의식주 문제의 기본적 해결을 목표로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출발단계에서부터 여러 가지 난관과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8월 종파사건(1956.8)으로 야기된 노동당 지도
이주일/ 2000년 탈북·전 평남 평성시 당 지도원평남 평성시 당(黨) 외화벌이기관에서 지도원으로 일했다. 해마다 김정일(2.16)·김일성 생일(4.15) 무렵이면 모든 단체가 외화벌이 총력전에 나선다. 직장생활 따로 외화벌이 따로 해야 하니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융통성 있는 직장에서는 직원들의 외화벌이 할당량을 감당할 사람을 선발해 이 일만 맡기기도 한다. 송이·갯지렁이·송화가루 할 것 없이 돈이 될만한 품목은 무엇이든 찾아내야 하지만 가장 흔한 것은 역시 사금(砂金)을 채취하는 것이다. 나 역시 노른자위 직장
박두익/2000년 탈북, 전 북한 8·15훈련소 선전대 작가경수로 건설이 한창인 함남 신포는 어항(漁港)으로도 유명하다. 생선을 잡아올려 통조림을 만들거나 제분 가공을 할 수 있는 시설까지 갖춘 원양어선 「금강산」호가 들어와 정박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 네덜란드제 배는 가공모선으로서는 북한 최대일 뿐 아니라 유일하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덕분에 신포에는 김정일 지시로 만들어진「어로공 문화회관」도 있다. 이곳에서는「먼바다예술선전대」를 조직해 정기적으로 바다에 나가 원양어선 선원들을 위해 노래와 화술로써 사상교육을 하게 된다. 작가였던
김일성은 1980년 10월 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행한 사업총화보고를 통해 전례 없이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통일방안을 제시했다.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자」는 소제목이 붙은 이 보고에서 김일성은 남북한이 서로 상대방에 존재하는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인정하고 용납하는 기초 위에서 민족통일정부를 수립하자고 제의했다. 또 민족통일정부 아래에서 남북한이 같은 권한과 의무를 지니고 각각 지역자치제를 실시하는 연방공화국을 창립하자고 주장했다. 종래 선언적 수준에서 산만하게 제시해온 통일제의와 방안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보완한 이 통일방
김성준/인민군장교 출신·97년 탈북강원도 원산에서 나서 자랐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밭 명사십리와 송도원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이곳의 진짜 명물은 한 달에 두 번씩 일본에서 건너오는 만경봉-92호다. 이 배는 닫힌 북한 사회에 해외문물을 실어나르는 역할을 해왔다. 평양∼원산 간 고속도로를 통해 진귀한 물건들은 평양으로 고스란히 올라가겠지만, 그 통로인 원산에 떨궈놓고 가는 것이 왜 없겠는가. 평생 가도 외국사람 얼굴 한 번 보기 어려운 북한이지만, 원산 사람들에게는 조금도 신기할 것이 없었다. 70년대 말부터 오기 시작한 조총련
북한은 6·25전쟁이 휴전선을 중심으로 고착되면서 소강상태를 보이던 1952년 12월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했다. 김일성은 1952년 11월 27일 내각 제24차 전원회의에서 행정체계와 행정구역 개편방침을 천명했으며 다음달 22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북반부지역에 있어서의 행정체계 중 면(面)을 폐지함에 관하여」라는 정령을 발표해 행정구역 개편을 법적으로 뒷받침했다. 기존 행정단위 가운데 면을 폐지함과 동시에 군(郡)을 세분하고 리(里)를 통합하며, 군의 중심 리를 읍으로 부르기로 한다는 것. 공장·광산·어촌의 리 가운
해방 후 공산주의 사회 건설 첫 대중운동사상개조 초?┨??뭡解?인사 비판광복 후 첫 중앙정권기구로 등장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1946년 봄부터 가을까지 「민주개혁」이라는 이름아래 토지개혁과 주요 산업국유화 등 일련의 공산화 개혁조치를 단행해 북한은 사회주의 사회를 향한 첫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전반적인 사회분위기와 정서는 새로운 환경과 질서에 부응하지 못한 채 과거의 인습과 생활방식에 깊이 침잠해 있었다. 1946년 말 일제 식민잔재와 봉건유제(遺制) 청산, 새 사회 건설을 기치로 닻을 올린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은 이런 괴리와 불
김기성/99년 탈북·홍익대 산업디자인과 재학.내 고향은 평안남도의 작은 산골이다. 아버지는 평생 광산 노동자로 고지식하게 사신 분이다. 어머니 역시 그런 아버지에게 순종적이고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외아들인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발육도 뜨고 몹시 약골이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너는 육체노동은 할 수 없으니 하급 사무원이라도 되려면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러나 내 공책에는 수학문제가 아닌 만화그림만 가득 그려지곤 했다. 공책 검열을 받을 때면 선생님들에게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모른다. 욕을 먹고 매를 맞으면서도 그림이 좋았다.
김영일따뜻한 봄날이다. 내 고향 함북 온성에는 3월까지 뼛속까지 시린 찬바람이 분다. 지금쯤은 강가에 버들강아지가 필 것이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96년 3월, 나는 오랜 군복무를 마치고 부모님이 살고 있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현실은 말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월급도 배급도 없이 허기진 배를 끌어안고 먹을 것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으며 가정이 파탄나는 일은 수도 없이 많았다.우리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직장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부모님을 도와 화전(火田)을 일궈 살림에 보태기로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괭이와 삽을 메고 산
북한은 6·25전쟁이 끝난 후 전후복구와 사회주의혁명을 추진하면서 농업협동화를 중요 과제의 하나로 제시했다. 개별 농민들을 사회주의적 집단경영 형태인 농업협동조합에 망라시키는 농업협동화 구상은 전쟁이 소강상태를 보이던 1952년 중순 경 이미 움트고 있었으며, 1953년 8월 전후(戰後) 처음 열린 당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에서 당의 공식 방침으로 결정됐다.제6차 전원회의 결정에 따라 1953년 말부터 경험적으로 각 군마다 3∼4개의 농업협동조합이 조직돼 운영되기 시작해 1954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이후 1954년 말∼19
서경희/함북 경성 출생. 99년 탈북.북한에는 마을이든 학교든 빠짐없이 김일성 혁명역사연구실이라는 곳이 있다. 흰 양말을 신고 단정한 옷차림으로 들어가서 경건하게 학습을 받는 「의식」(儀式) 장소다. 이곳만은 윤이 나도록 깔끔하게 청소하고, 고급스럽게 단장해야 한다. 내가 북한에서 유치원 교사로 일하고 있었던 96년 김일성 연구실외에 김정일 연구실을 하나 더 만들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탁아소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모든 사회단체들이 이 사업을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평가하는 일로 삼고 있어 전투를 방불케 했다. 연구실을 만들려
생산현장에 기술·사상 점검 목적 청년층 파견실무경험 없고 분란 일으켜 '원성의 대상'전락북한 「사회주의건설의 총노선」으로 규정된 3대혁명(사상·기술·문화) 수행의 전위대·선봉대로서 3대혁명소조가 정식 출범한 것은 1973년 2월이다. 1973년 2월 1일 열린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결정에 따라 2월 중순 3대혁명소조가 공장·기업소 등 공업부문에 나갔고, 2월 하순에는 협동농장과 국영 농목장(農牧場)에도 파견됐다.북한은 이에 앞서 72년 가을 「기술적 방조」(기술지원)를 명분으로 일단의 지도소조를 경공업공장에 파견해 사전 탐색작업을
1962년 12월 10일 평양에서는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당중앙위원회 제4기 5차 전원회의가 개막됐다. 회의에서는 '조성된 정세와 관련하여 국방력을 더욱 강화할 데 대하여'와 '1962년도 인민경제계획 실행총화와 1963년도 인민경제발전계획에 대하여'라는 두 개의 의제가 상정됐다. 나흘간 계속된 회의 결과 경제건설과 국방건설을 함께 추진한다는 이른바 '경제와 국방을 병진(竝進)하는 노선'이 노동당의 기본 노선으로 규정됐으며, 구체적 방도로서 4대 군사노선이 채택됐다. 또한 당의 군사전략과 노선을 토의·결정하고 군사력 강화와
유지성/평양음악무용대학 졸업·99년 탈북90년대 들어 평양에서는 친척 중에 외국에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첫 당부가 "제발 달아나지 말라"는 것이었다. 고위층에서는 가족이나 친척이 외국에 나갈 기회가 생겨도 탈북을 우려해 외국행을 막는 경우까지 있었다. 해외 출장자나 유학생들에 대한 북한 당국의 선정 기준도 까다로워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부부가 함께 나가는 경우에는 아이들 중 한 명은 ‘인질’로 남겨 놓고 가야 했다.연좌제의 고통에 시달렸던 음악대학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새롭다. 언제나 밝고 친어머니처럼, 친누나처럼 학생들에게 다정했던
생모 김정일 낳을 때 소련병영에 머물러김정일 본인 40회 생일 앞두고 출생설 조작북한 당기관지 노동신문과 정부기관지 민주조선은 1982년 2월 15일자 1면에 김정일에게 '공화국 영웅'칭호를 수여한다는 중앙인민위원회 정령(政令)을 실었다. "김정일동지는 항일의 피어린 나날 백두산밀영에서 탄생하여 혁명의 준엄한 시련을 체험하며 성장하였으며, 일찍이 주체의 혁명위업을 끝까지 수행할 큰 뜻을 품고 혁명활동을 시작하여 조국과 인민 앞에 불멸의 공적을 쌓아올렸다.…"김정일의 40회생일(2.16)에 즈음해 발표된 이 정령은 김정일이 영웅칭호를
문해성/황해남도 재령 출생. 99년 입국해 현재 서울 양천고등학교 재학.북한에서 만화영화를 보던 그 시절을 잊지 못한다. 그 중에서도 조선중앙TV에서 몇 번이고 방영해 주었던 '소년장수'(1982~97년까지 50부작으로 제작-편집자)! 고구려의 소년장수 쇠매와 적장 호비와의 대결이 흥미진진하다. 몇 번씩 보아도 재미있었고, 그 속에 동화돼 버리곤 했다. 오후 5시 뉴스가 나간 뒤 시작되는 만화영화를 보자면 오전반 인민학생들은 문제가 없지만 오후반은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뛰어야 한다. 줄을 지어 집에 가는 날엔 못 보게 될까봐 학급